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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세동 May 16. 2023

선생님인데 왜 아파요?

차세동의 표면

그는 그의 위치를 참 좋아한다.


청소년으로 국한하면,

청소년들의 학교, 학원, 기관, 길거리, 가게 어디서든 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feat.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


뿐만 아니라 차세동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때로는 성인까지도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만난다.

모든 현장을 경험하는 만큼 다양한 경험으로 그의 식견을 성장시킬 수 있어 좋아한다.


때는, 코로나 19가 창궐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이다.

그는 무척이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2시간의 수면, 22시간의 노동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해일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견딘다는 것 또한 그의 착각이었을 뿐, 휩쓸려 내동댕이 쳐지고 있었다.


한 번은 그에게 전화가 왔다.

지역사회 끝쪽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돈이 부족해도 사교육에는 몸을 담고 싶지 않았던 그였다.

입시필드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두 번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feat. 나도 당연히 선생님 될 줄 알았지)

답을 정해놓고 그 학원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이내 그의 답이 바뀌었다.


'선생님, 저희가 OO쪽에 있는 학원인데요~,

성적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여러 가지로 힘든 경우들이 많아요.

이 친구들을 잘 케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또 다른 실수를 만들었다.

서울에서 지낸 짧은 시간이, 그의 모든 인식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지역이 그렇지는 않지만, 또 학원마다 다르겠지만 종종 그런 학원이 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바쁜 부모님들께서 아이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보내는 공간.

아이들이 학교에서 찾지 못한 관계를 천천히 만들어가는 공간.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안정을 얻는 공간.

상처받은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 줄 어른이 있는 공간.

종종 그런 공간으로 기능하는 학원들이 있다.


그가 가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는 오히려 조금이라도 경제적 가난을 타개해야 했기에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 학원의 영어전담교사가 되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는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선호한다.

그가 제일 못하고, 못했던 과목이기에 잘 안 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잘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접점은 있어도 분명히 다른 영역이라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인 그였다.


원생들이 그려주었다. 그의 안경줄은 그의 시그니처였다.

돌아와서,

그는 그 학원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영어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 똘망똘망한 눈을 지닌 초등학생은 그에게 늘 호기심이 많았다.


'선생님 팔에 노란 리본은 뭐예요? 문신이에요?'

'선생님 한 문장에 동사가 왜 하나만 있어요?'

'선생님 밥은 뭐 먹었어요?'

'선생님 OO이형 알아요?'

'선생님 몇 살이에요?'

'선생님 얼마 벌어요?'

'선생님 코로나 걸려봤어요?'


대부분의 질문이 늘 그를 난감하게 했다.


하지만 그 질문하는 모습이 너무나 기특해서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오히려 그 순수한 호기심을 탐구할 기회를 소중히 여겼다.

질문의 수와 답변의 수가 늘어날수록 똘망똘망한 눈의 초등학생은 그를 유독 잘 따랐다.


이러한 순간순간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코로나 종식이라는 희망과 함께.


하지만 코로나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너무나 길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그를 넘어뜨리기 충분했다.

무너져 가는 예산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이들을 만날 자리와 무대들.

흔들리는 그로 인해 무너지는 팀과 소중한 사람들.

그는 아이들을 만날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행복한 선생님이 행복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서투른 아마추어였다.




어느 날, 똘망똘망한 눈의 초등학생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힘들어요?'


그가 답했다.

'선생님이 오늘은 몸이 좀 안 좋네..'


똘망똘망한 눈의 초등학생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인데 왜 아파요?'


그는 답했다.

'OO아! 선생님도 사람인데 아프지~ 아, 그래도 너희들 앞에선 항상 강한 어른으로 딱! 있고 싶은데 어째 쉽지만은 않다~'


똘망똘망한 눈의 초등학생은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래요? 형한테도 말해봐야겠다. 빨리 나으세요 쌤~'


똘망똘만한 눈의 초등학생에게 선생님은 그런 어른이었다.

몸에 뭐가 있으면 신기한 사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볼 사람.

밥은 먹었는지 궁금한 사람.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

몇 살인지 궁금한 사람.

잘 사는지 궁금한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모두 수업을 하는 그가 관찰하는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이 있다.

바로 수업 끝, 그가 늘 하는 멘트다.


'질문 있어요?'


반응은 각각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수업 : 손 안 들면 혼나기라도 하는지 손을 번쩍번쩍 든다. 안 시켜주면 서운해한다. (수업과는 크게 상관없는 질문이 많긴 하나 그 질문들이 예능처럼 재미있다.)

중학교 수업 : 머뭇머뭇 손을 들거나 서로 눈치를 본다. (오히려 손을 들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외친다.)

고등학교 수업 : 조용하다. (수업을 당장 끝내 달라는 말과 동의어로 '없어요~'를 외치고는 한다.)

성인 수업 : 침묵. (종종 질문시간이 끝나고 따로 나에게 질문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들 질문하면 혼이라도 나는 건지 놀라운 속도로 질문이 사라진다.

특히 전환기 청소년들은 가히 경이로울 정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두 손 두 발 모두 들며 질문을 하겠다던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이 되어 바뀐 것이라고는 아직은 맞지 않는 큰 교복차림과 다니는 학교뿐인데

놀라울 정도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다들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걸까..?)


그는 해당 현상에 대표적 원인으로 다음을 고른다.

질문은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

질문은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는 두 가지 기류를 만들어낸다.

하나, 질문이 수업내용과 관련 있으면서도 선생님이 대답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만해야 한다는 기류.

둘, 질문은 좋은 것을 위한 수단이라는 기류.


부연설명을 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하나, 질문이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는 '좋은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의도하지 않더라도 형성한다. 여기서의 좋은 질문은 수업내용과 관련 있으면서도 선생님이 대답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당연하게도 질문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 이에 더 나아가 애초에 질문을 시도하지 않는 선택지를 고른다. 오히려 편한 선택지이다.

-> 하지만 이는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을 구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 이는 결국 더 질문을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둘, 질문 그 자체로는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독후감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독서 후에는 늘 독후감을 써야 하는 당연한 문화를 교육받았다.

이는 곧 '독서=독후감'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낸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모두 글쓰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독서는 좋아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말로 풀어내는 것은 많은 연습과 시간이 필요한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런 것들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결국 [독서=독후감] -> [독후감=부담 혹은 싫은 것] -> [결국, 독서는 = 부담 혹은 싫은 것]으로 변모한다.

독서를 독서 그 자체로 놓지 않는다.

질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질문은 질문 그 자체일 때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을 남발하며 좋은 질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질문이 좋은 것을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질문은 부담이 된다. 이는 위와 같은 악순환을 낳는다.

질문을 시도하지 않게 되고,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을 구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이는 결국 더 질문을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이 된다. 




사실 그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좋은 질문'이 아직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지금 3살짜리 조카가 있는데 그가 그 아이에게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잘 잤어?'

'맛있어?'

'오늘 기분은 어때?'

'재밌어?'

'배고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들이 받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다 했어?'

'언제 할래?'

'왜 안 했어?'

'이걸 아직도 몰라?'

'언제 철들래?'


좋은 질문의 본질이 '무엇을' 물어보는가에 있다면,

그 '무엇'은 삶에서 중요한 것을 물어봐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좋은 질문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성장의 관점에서 당연한 순리인 것 같은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3살짜리 조카가 받는 질문이 더 좋은 질문인 것 같다고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오늘 기분은 어떤지가 살면서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똘망똘망한 초등학생의 질문들 속에 그가 잘 먹고 잘 사는지와 같은 본질이 담겨있다.

그는 그 모든 질문들이 '좋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세상에 등장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기술에 금방 친해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Chat GP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그는 '공부'와 '교육'의 패러다임이 이번에는 바뀔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가 Chat GPT와 관련된 교육을 하거나 이야기를 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이 '질문하는 능력'이다.

질문에 대한 기준이 드디어 바뀌었다고 했다.

좋은 질문의 기준이 '정답'을 찾는 질문에서 호기심을 '탐구'하는 질문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몸에 뭐가 있으면 신기한 사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볼 사람.

밥은 먹었는지 궁금한 사람.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

몇 살인지 궁금한 사람.

잘 사는지 궁금한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 탐구할 것들 투성이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의 상식 밖 슈퍼맨이기를, 

누군가의 상식 밖 낭만쟁이이기를,

누군가의 상식 밖 인생이기를.


선생님인데 왜 아파요?라는 질문에

오히려 그는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1. 본인이 아프면 안 되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으로서 전할 수 있었던 호기심.

2. 본인이 아픈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질문에 대한 고마움.


'질문'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는 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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