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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세동 May 13. 2023

들키고 싶은 약봉투

차세동의 이면

어릴 때부터 활동적이었던 나는 참 많이 다쳤다.

손이 부러지고 다리를 삐는 일이 허다했다.

축구를 참 좋아하는 소년의 흔한 일상이었다.


정형외과는 나에게 편안한 공간이 되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길에서 만나는 간호사 선생님들까지

나를 쉽게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정형외과 단골이었다.


병원이 그토록 나에게 편안한 공간이 되는 동안

집은 그토록 나에게 불편한 공간이 되고 있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몇 가지 강박들은 이제 나에게 늘 따라오는 수식어가 되었다.

생각보다 이 단어들이 주는 구속력이 크다는 걸 하루하루 체감하고 있다.

스타트업의 대표, 1남 2녀 가족의 막내이면서 장남, 누군가의 선생님이자 스승...

다양한 역할들이 나의 우울증과 불안장애, 몇 가지 강박들의 원인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시작은 있었다. 시작은 그리 복합적이지 않았다.  


처음 정신과를 찾았던 건, 고등학생 때 일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없는 사람 누구 하나 없겠지만, 나 또한 그 누구들 중 하나였다.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구성원들 속에 무너져가는 가족

막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속에 유기당하는 것뿐이었다.


수 없이 많은 도움을 구했다. 

살려달라고 간절히 빌었고 뻗을 수 있는 손은 전부 뻗어냈다.

누군가는 '더 적극적이었어야지!'라고 힐난해도 그것이 내가 지를 수 있는 최선의 비명이었다.

고작 열일곱의 나는 가족들에게 나의 어려움들을 연신 토해냈지만

그들은 그 아픔을 받아낼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들 또한 아파하는 중이었다.

커다란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나의 아픔을 이야기해도 그들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가족들은 모든 이야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마냥 지냈다.


나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토해내는 것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았다. 상담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학교 상담은 늘 여유가 없었으며 국가 지원 상담은 대기만 1~2년이었다.

사설 상담은 비싸기만 했다. 그 비싼 돈을 들여 오히려 상처를 사고 돌아왔을 때 나는 무참히 좌절했다.


상담으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의학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정신과라는 진입장벽은 고등학생의 나에게 너무나 높았다.

검색하기를 수차례... 병원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수차례...

글 쓰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것이,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이 익숙한 나에게 매우 어색한 경험이었다.


사실 고민과 머뭇거림은 나를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또다시 자책하는 굴레에 빠져있었다.

아픔이 곪고 곪아 터질 때쯤 나는 발걸음을 뗐다.

초진을 위해 예약을 잡고, 병원에 다녀왔을 때 나에게는 1주일치 약이 든 약봉투가 있었다.


약봉투를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고민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도 그 고민이 끝나지 않아 집 앞 벤치에 한 참을 앉아있었다.

'이 약봉투를 대체 어디에 놔야 하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약봉투를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이 약봉투를 발견하면 좀 달라질까?'

정신과 진료정도 되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들이 아닌, 진심이 담긴 관심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 숨기면서도, 내심 가족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애매한 위치.

나는 그곳에 약봉투를 두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가족들 중 누군가는 분명히 내 약봉투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축구를 좋아했던 나는 머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푸른 잔디밭 위로 선홍빛 피가 튀겼다.

정신이 몽롱함을 깨달았을 때 내 얼굴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사실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피가 좀 많이 나서 무서웠을 뿐.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피범벅이 된 나를 보자 그녀는 눈물을 쏟아냈다.

피범벅이 된 나를 보자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취 없이 꿰매라는 말만 전했다.

잘 꿰매고 잘 나았다. 별로 아프지 않았기에 그리 기억에 남는 일화도 아니다.

수없이 다쳤던 나의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머리를 다쳤을 때보다,

정신과를 드나들며 약을 받아오는 일이 몇 배는 더 아프고 무서웠다.

내 약봉투를 분명 발견했을 텐데.. 변함이 없는 이 집 안 양상에 나는 또 한 번 무참히 좌절했다.

시간이 흘러 변함이 없는 그들에게 분을 토해내며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밖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

손바닥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종류의 알약을 매번 식후 입에 털어넣야했던 이야기.

그간 그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들을 지키려 분투하는 모순된 정의에 허덕이는 나의 이야기.

분을 토해내며 이야기하기에 이르렀음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여전히 모든 이야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피를 쏟아낼 때보다 몇 배는 더 아프고 두려웠다.

그래서 더 내가 피범벅이 되었을 때 쏟아내던 그녀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 때나 지금이나 무관심했던 그의 일관성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그들이 내 약봉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믿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아픈지 가족들이 잘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약봉투를 최선을 다해 숨기면서도,

내심 가족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애매한 위치.

그곳에 나의 약봉투를 둔다.


1. 이 모든 경험은 청소년, 청년들을 만나는 나에게 나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선물한다.

2. 나는 여전히 우울과 불안, 몇 가지 강박들을 치료한다. 종종 찾아오는 공황은 덤이다.

3. 이제는 대놓고 책상 위에 약봉투를 둔다. 그럼에도 변하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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