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세동 May 31. 2023

너가 지키겠다는 그 본질이,
우리를 망하게 해

차세동의 이면

본질(本質)
그 사물을 성립시키고 그 사물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존재

포털사이트에 '본질'을 담아본다.

스타트업인 우리에게 비춰보면 본질이란 곧,

우리의 존재이유와 우리의 가치일 것이다.


'특공대 만들기, 스타트업 팀빌딩'에서 한 번 언급했듯이,

내가 대표로 자리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 하나, 이 본질을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본질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본질을 지킨다는 것은,

해당 팀이 스스로의 비전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해당 팀이 스스로 방향키를 잡고 항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종종 기술이나 능력이 출중한 팀들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고

일종의 '외주회사'가 되는 모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팀의 부족이라기보다 실제 현장에서 본질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물론, 회사와 상황마다 모두 다르겠으나

존재하기 위해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는 역설적인 경우들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외주를 선택하는 이유 자체가 스스로와 팀을 지키기 위한 자금을 끌어오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그것이 곧 그들의 생명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들의 생명줄이 되는 순간,

그들은 이제 그 생명줄을 놓기 위해서 '목숨 건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생존과 존재를 보장받을수록 애초에 존재했던 팀의 존재이유는 점차 흐려져만 간다.

그것이 '돈'의 힘인 것 같다.

'월급'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들은 알지 않는가.

때로는 돈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커다란 관성을 부여하는지.


물론, 본질이 항상 옳은 것만도 아니다.

특히, 스타트업.

비즈니스 필드에서 신생 팀이 지닌 본질은 '다른' 것도 아닌 '틀릴'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결국 해당 팀의 존망은 그 팀이 스스로의 본질을 얼마나 날카롭고 뾰족하게 만들어,

시장과 세상에 적절히 전달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을 것인데

이 과정은 상당히 괴롭고도 어려웠으며 우리 또한 그 과정 속에 있다.

버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식견이 대단하다고 되는 것 또한 아닌 듯싶다.

어느 필드나 유사하겠으나, 내가 경험한 바로 이 스타트업 필드는,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음이 자명해 보였다.




그 속에서, 그 어떤 타협도 뿌리치며

본질만을 굳건하게 외치던 나는,

우리를 아프게만 했다.


누군가는 답답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누군가는 현실감각 없는 몽상가라며 힐난했을 테지.


본질만을 굳건히 외치던 나는

그로 인한 성공과 실패, 모두를 경험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으나,

그 당시에도 나는 '본질을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 기회와 때는 온다'라고 믿었다.


나는 종종 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돈만 없는 회사'


뜻을 함께 하는 팀원들과,

확고한 비전,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추진력과

아이들에게서 증명받는 우리들의 가치.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본질이 없냐?'라는 말들로 우리는 우리를 다독였다.

저 한 문장에 의지하며 우리는 굳건히 지키던 본질을 합리화했다.




돈만 없는 회사, 1억을 받았다.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초기창업가들의 입문코스로 불리는

예비창업패키지(이하.예창패)와 청년창업사관학교(이하.청창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때는, 우리가 경기 청년창업사관학교(청창사)에 합격했을 때이다.


당시 청창사는 팀 별로 1억 원 이내의 사업비와 여러 코치, 교육, 인프라 등을 지원했다.

그렇게 돈만 없는 회사에게 돈이 생겼다.


그때의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우직하게 본질을 지키고 있었던 내가 드디어 인정받는 듯했다.

인정받았다는 기쁨보다, 나 스스로가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세상이 이제야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당시 기준으로 그 정도로 규모 있는 투자와 지원이 처음이라 걱정도 되었으나 잠깐이었다.

그동안 상상으로만 준비했던 모든 재미난 일들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에 신이 났다.

지금까지 우리를 응원해 준 모든 분들과, 매년 어른이 되는 제자들,

부족한 식견에 더 큰 세상을 더해주었던 모든 선생님과 스승님들,

무엇보다 작은 순간이라도 함께 달렸던 모든 팀원들과 친구들까지 감사한 사람들이 잔뜩 떠올랐다.

'그건 꿈일 뿐이야!'라며 때로는 나를 상처 내었던 사람들에게 까지도

내가 뱉었던 '꿈'을 선물하겠노라 다짐했다.

자만하지 않고, 초심을 잃지 않고, 여전히 맨땅에 헤딩하고 있음을 명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돈도 없는 회사, 1억을 날렸다.

돈만 없는 회사라는 자부심과,

그런 우리에게 돈이 생겼다는 그 기쁨도 잠시,

문제는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워낙 가난하고, 밑바닥부터 올라왔기 때문에 1원까지도 허투루 쓰지 않는 강점을 지녔다고 속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워낙 비교적 큰돈을 써본 적이 없었기에 1원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위에 적었듯이,

비즈니스 필드에서 신생 팀이 지닌 본질은 다른 것도 아닌 틀릴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전혀 몰랐으며 전혀 의심해 본 적 없었다.


'너가 지키겠다는 그 본질이, 우리를 망하게 해.'

가장 아픈 피드백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의 본질이 너무나도 무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미가 좋고, 비전이 확고하면 무엇하는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

세상과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인사이트를 전할지언정,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다.


스타트업 필드에 와닿도록 이야기해 보면,

들었을 때 '와 대단하다! 정말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반응을 얻지만,

'그래서 살래?'라는 질문에는 답을 얻지 못하는 꼴이다.


'돈만 없는 회사'라는 합리화 속에,

'돈도 없는 회사'라는 뼈아픈 단어를 지워왔던 것은 아니었나.


처음 청창사에 합격했을 때,

그동안 상상으로만 준비했던 모든 재미난 일들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에 신이 났지만, 한 편으로는 조급했다.

'돈만 없는 회사'에게 '돈'이 생겼으니 우리는 완벽에 가까운 혁신을 세상에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돈만 없다.'라는 근시안적인 합리화 속에 다른 문제들을 유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1억을 받았을 때, 우리는 10억, 100억, 1조 단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스타트업이 투자와 지원을 받아 마땅한 태도였다.

1억짜리 배움을 사고, 청창사를 졸업한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다음 기회와 때를 기다리기에는 막막함이 앞섰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글을 읽어온 당신은 알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기다리기보다는 달려가는 사람에 가깝다.

때로는 양날의 검이 되는 나의 달리기는 제대로 된 방향을 잡으려 애썼다.


날카롭고 뾰족한 본질을 만들어야 했고,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버텨야 했다.




스타트업의 과정은,

때로는 너무나 긴 나의 청춘을,

때로는 비싸디 비싼 돈과 숫자들을,

때로는 돈으로 살 수 없을 소중한 관계들을,

때로는 나의 몸과 마음까지도,

전부 앗아간다.


그럼에도 나는 이 필드를 사랑하니,

이 필드를 벗어나지 않으니,

앞으로의 나의 성장을 기대해 주길.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의 일, 나의 공간, 나의 모든 것이 무너질지언정

나의 철학과 신념이 무너지지 않는 한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다.


나의 미래를 종종 구경하며 내가 나의 말에 무게를 지켜나가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이 지켜봐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 20화 렛츠 피봇! 회사명을 바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