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배울 수 없는 것도 있는 법
새로 온 아파트 단지와 동네 주변을 익혀두려고 구석구석 산책을 하다가 통장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마침 우리가 사는 동이 포함된 구역의 통장을 뽑는다고 해서 나는 냅다 옆에 있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통장 안 할래? 용돈 벌이도 가끔 할 수 있고 시간도 있잖아. 동네 사람 사귀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엄마는 그런 일은 못하겠다고 했다. 글씨를 잘 못 써서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손글씨가 반듯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맞춤법에 알맞게 쓰는 게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1958년생이다. 전쟁 이후 아주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으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너무나도 가난하고 초라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아빠도, 엄마도, 엄마의 형제자매 대부분도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장남이 아닌 자녀들까지 초등학교를 졸업시킬 돈이 없었던 탓이다. 아빠는 12살 때 서울로 올라와 객지 생활을 했다는 얘기가 입버릇인데 13살 때 마찬가지로 상경하여 공장 일을 했다는 엄마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자신을 가르칠 능력도 의사도 없었던 부모를 원망하는 얘기를 많이 했던 아빠만큼 엄마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걸 속상해하거나 부끄러워하리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써야 할 때 나를 곧잘 부른다. 맞춤법을 확인해 달라고 하거나 문장을 써달라고 하기 위해서다. 영어가 섞인 가전제품 모델명을 읽어야 할 때, 한글이 아닌 브랜드 이름을 숙지하고 매장을 찾아가야 할 때도 자주 불려 간다. 어떤 이름의 커피가 달달하느냐는 이벤트성 질문도 가끔 있다. 성인문해교육을 1년 정도 들은 적이 있고 그 책을 이사할 때 고스란히 가져온 엄마지만 오랫동안 발목을 잡던 것의 마력은 건재한 것 같다.
나와 절친한 친구, 혹은 무척 친한 사이인 언니들의 부모님은 다 고등 고육을 받았다. 교복 입던 시절 나는 가끔 내가 틀린 문제를 설명해 줄 사람이 집에 없어 속상해했다. 똑같은 걸 계속 말해줘야 할 때는 답답함이 불쑥 드러나기도 한다. 문득 그런 것들이 때를 놓쳤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되지 않는 엄마의 상처를 자극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엄마는 내가 할 줄 모르는 걸 한다. 동네 식당에서 이웃 학생의 밥값을 대신 내준 할머니를 눈에 담아두었다가 화분을 들어줄 줄 안다. 청소 도구를 빌려준 아파트 청소 담당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며 율무차를 줄 줄도 알고, 길을 물어본 걸 계기로 같은 단지 아주머니를 사귈 줄도 안다. 노인복지관에 가서 봉사활동을 신청할 수 있는 마음씨도 지니고 있다. 그 어떤 학교나 학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자질이 엄마에게는 분명히 있다.
몇 달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 내용이 기억난다. 엄마가 짐을 들어주었다던 그 할머니는 고맙다면서 집에 같이 가서 커피나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단다. 그때 엄마는 거절하면서 낯선 사람을 그렇게 선뜻 집에 들여놓으시면 안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대답했는데, 그에 할머니의 대답이 이러했다고 한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얼굴 딱 보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뭐, 맞춤법이 헷갈리면 검사기를 돌리면 되고 영어를 모르면 번역기를 쓰면 된다. 메뉴 이름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 직원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다. 딱 봐도 좋은 사람인 우리 엄마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