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함께 다채롭게 살자, 마지막 기억을 위해
나와 관련된 고민을 제외하면, 내가 생각했을 때 엄마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본인이 치매에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피해를 끼칠 게 제일 걱정되시는 것 같다. 엄마는 예전부터 본인이 치매에 걸리면 요양원으로 보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본인 앞으로 남아 있는 정기예금은 거의 장례식 비용으로 여기는 듯하다. 아빠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본인이 혼자 있을 때 심장병으로 쓰러지는 일인 것 같던데, 이런 걸 보면 역시 두 사람은 참 달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유별나고 성격이 독특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엄마는 70대를 코앞에 두고 있고 지난날의 스트레스로 인한 자율신경계 관련 질환을 비롯해 여러 병을 앓고 있다. 평생 학교 졸업장 한 번 받지 못한 채 지하에 있는 작은 선풍기 공장에서 납땜을 하고, 혼자 언니를 키우면서 여관을 운영하고, 횟집부터 분식점, 아마 내가 모르는 종류의 음식점까지 본인이 일을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만 살았던 엄마가 뒤늦게 맞이한 새로운 인생은 앞으로 10여 년 정도밖에 허락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엄마가 조금 더 일찍 결심할 것을, 가령 더 젊었을 때 운전을 배우고 지금보다 덜 아팠을 때 몇 달이라도 더 빨리 이혼했다면 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아쉬워하는 걸 이해한다. 그러나 내 역할은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성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말을 꽤 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다시 시작하게 됐잖아. 영영 못 해보는 것보다는 낫지. 엄마는 내가 상담사와 똑같은 말을 한다고 신기해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결국 우리가 죽을 때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기억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가장 최근에, 가장 선명하게 벌어졌던 일을 기억했을 때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면 괜찮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건 사실 나의 믿음이자 내 경험을 심화해서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 나의 존재와 너무나 상충된다면 거기서 어떻게든 벗어나겠다는 결의와 용기가 생긴다. 더불어 조금 겸허해지고,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어느 정도 순응하면서도 소박하게 나 자신을 인도해야겠다는 방향성이 생긴다. 그 방향성에는 때로는 새롭고 때로는 익숙한 즐거움과 행복을 창조하는 일이 꼭 동반된다.
그래서 이번에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엄마와 크리스마스 디너 코스 자리를 가졌다. 우리 빼고 전부 젊은 커플들이어서 엄마는 살짝 민망했던 모양이지만 와인도 음식도 다 맛있게 먹어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탁상 트리를 점등해 놓고 '크리스마스 캐럴의 정석'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은 채 촛불을 불었다. 주말에는 여전히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동네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처음으로 유튜버의 먹방 영상에서 나온 가게를 찾아갔다. 설날 연휴에 엄마와 1박 2일 국내 여행을 갈 계획을 짜고 있다. 어제는 이모가 이사 선물로 사준 에어프라이어 오븐을 가동해 봤는데, 둘이서 나란히 고구마가 구워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새롭고, 재밌고, 평화로운 일들이었다.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치매가 예방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치매를 걱정하기에는 확실히 이른 나이부터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 꼭 가본다거나 하는 작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었다. 결국엔 그런 걸 기억하고 일기에 적게 된다. 일상의 흐름은 대부분 정해져 있고 그렇기에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시간에 인식되지 않는 구멍과 진부함이 늘어간다.
하지만 나는 이 삶의 궤적에 가치 있는 방점을 최대한 많이 찍고 싶다.
엄마도 나도 최후의 순간에 아주 오랜 과거를 되짚을 수 있는 여유나 능력을 가지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함께 다채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마지막 기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