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재미 있어 하니까 할아버지는 신이 났다. 샤토 도스몽 탐험이 계속된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73
"포도가 익으면 수확을 해야죠? 익는 시기에는 한 2주 동안 집중적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그 기간에는 20명 정도가 일을 해요. 평소에요? 우리 부부와 다른 가족들까지 다섯 명 정도가 전부입니다." 3만 평을 5명이? 노동강도가 어떠려나...
수확철에 샤토에서 일을 돕고 밤에는 포도주를 즐기면 어떨까도 상상해본다. 다 따서 탱크에 넣은 다음에는 거하게 파티를 하는 거지. 영화에 그런 장면들은 숱하다. 어느 비행기에서 보면서 와인을 계속 홀짝였던 '버건디로 돌아가다'(Back to Burgundy, 2017)처럼?
"수확한 다음에는 포도 즙을 짜냅니다. 기계로 압착해냅니다. 그리고 숙성에 들어갑니다."
우리집도 포도밭이 있었다. 아주 소소한 규모였지만. 수확 과정에서 떨어진 포도알을 모아서 어머니는 포도주를 담갔다. 포도주 독은 설에 헐어서 손님들을 대접하곤 했다.
시골 포도주에는 설탕이 듬뿍 들어갔고 어떤 해에는 꽤 독했다. 어린 나는 포도주를 떠온 대접이나 바가지에서 포도알을 주워 먹다가 취해서 술상 옆 방바닥에 골아떨어지곤 했다.
보르도 포도주에도 설탕을 넣을까? "네. 우리도 설탕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포도가 충분히 달지 않으면 어쩔 수 없어요. 당도가 너무 낮으면 알코올이 안 생기거든요."
검색해보니 그런 해가 있다. 보르도의 2013년은 추운 봄, 그리고 수확 직전의 비로 포도가 잘 안 익은 해였다. 2017년에는 심각한 서리 피해로 포도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프랑스 법은 설탕 사용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지만 첨가량은 엄격하게 제한한다. 설탕을 넣은 와인은 물론 무가당 와인보다 싸게 팔린다.
숙성실에서는 매일 샘플을 채취해서 분석실로 보낸다고 했다. 무슨 성분이 일정 기준 이하로 내려가야 통으로 옮긴다고 했다. 현장에서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찾아보니 당분 검사를 하나보다. 잔여 당분(Residual Sugar)이 아직 많으면 숙성이 덜 되었다는 뜻이다. 리터 당 2그램 아래로 내려가야 오크통으로 옮긴다.
"다음주에는 숙성이 끝났다는 결과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름에 딴 포도를 가을 내 숙성시키고 나면 이제 오크통에 넣는다. "오크통에 넣는 기간은 딱 1년입니다. 지금 이 통 안에 들어 있는 건 작년에 만든 것들입니다."
아 그래서 지금 2022년산 포도주들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는 거로구나. 주스를 짜낸 다음에 숙성을 시킨 뒤 오크통에 넣어서 꼬박 1년을 기다린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오크통을 헐어서 포도주 병에 담고 라벨을 붙여서 시장에 내놓는다.
"오크통은 매년 3분의 1 정도는 새 걸로 바꿉니다. 오래된 오크통이요? 아뇨 버리지 않습니다. 포도주 향이 베어 있으니까 다른 술 만드는 곳에서 가져가죠. 코냑 회사 같은 곳에서 사갑니다."
오크통도 재사용하는구나. 과실주를 증류해서 만드는 코냑을 포도주를 숙성했던 통에 숙성하면 특유의 향이 더 진해지겠다. 그렇게 오크통은 질서 있는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숙성실 한쪽에 대형 도자기? 토기? 통이 있다.
"간혹 오크통에서 숙성한 포도주에서 나는 특유의 향을 즐기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젊은 소비자 중에 그런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숙성 방식을 찾은 겁니다. 세라믹 통은 오크통보다 커서 한 번에 더 많은 양을 숙성시킬 수 있습니다. 오크향을 입히지 않기 위한 거라 세라믹 통은 3년마다 바꿀 필요도 없어요. 비용이 적게 드는만큼 당연히 여기에 숙성시킨 와인은 조금 더 저렴하게 팔 수 있습니다."
자자 할아버지 설명은 그 정도면 충분해요. 실은 나는 시음 시간만을 기다렸다고요. "어제는 중동에서 온 단체 손님을 맞이하느라 힘들었어요. 오늘은 두 분만 있어서 좋군요. 오늘 드셔볼 와인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생산된 빈티지들입니다."
음 기대만큼 대단한 맛은 아니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그래도 이 할배가 1시간 가까이 쉼없이 설명을 하셨으니 최소 한 병은 사자. 가져가서 마셔보고 마음에 들면 한 상자 런던으로 배송을 시키지 머. 내 선택은 2020년 빈티지.
병입만 하고 라벨은 아직 붙이지 않은 와인이 출고장 한쪽에 쌓여 있다. 종이 상자에 완전히 포장된 제품도 있다. "일본에서 우리 포도주를 많이 사갑니다. 저 제품도 모두 내일 일본으로 갈 것들입니다. 한국에는 아직 거래선이 없군요." 국내 수입이 되면 잘 팔릴까?
돌아오는 길에는 숙소에서 미리 불러주신 택시로. 세미정장 재킷을 차려입은 멋쟁이 아저씨가 운전하시는 SUV를 타고 돌아왔다. 아저씨는 오전 11시부터 가벼운 와인 마시는 시간을 즐긴다고 했다. 긴장을 풀어주고 행복감을 준다고. 그래 그게 낮술의 맛이지.
오후에는 와인 박물관에 가서 와인의 모든 것을 공부한다. 의외로 전시가 탄탄해서 놀랐다. 고대로부터 와인을 만들고 마셔온 인류의 역사, 포도의 품종, 와인을 만드는 방법, 지역별 특징 등이 아주 꼼꼼하게 큐레이션되어 있었다. 전시 내용 뿐 아니라 여러 감각을 자극하는 전시 설계도 아주 좋았다. 보르도에 간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나면 8층에 올라가서 와인 한 잔을 시음할 수 있다. 와인 한 잔을 골라 들고 통유리창으로 가면 보르도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역시 굳이 종탑에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막바지 보르도 여행은 다시 쇼핑. 아이가 생일파티 때 친구들 나눠줄 선물을 사야 했다. 또 곧 떠날 북유럽 여행에 대비해서 따뜻한 패딩도 하나 사고. 실용적 목적이 강한 쇼핑이었지만 거리는 다시 봐도 정말 예쁘다. 보르도 구시가지는 흥청거렸던 과거의 영광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공항 면세점에서도 마지막 와인을 조금 더 사서 돌아온다. 곧 로이 할아버지 생신이니까 좋아하시는 화이트 와인 한 병, 아내가 원하는 레드 와인 한 병.
보르도 여행은 맛난 음식과 멋진 풍경과 새로운 지식과 경험으로 가득했다. 벌써 그립다. 언제 보르도 포도밭 사잇길을 걸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