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여행 2일차
보르도 여행 첫 날, 시내는 볼 만큼 봤다. 딱 한 곳, 와인박물관 빼고.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71 둘째날은 포도주 이야기를 좀 보고 듣자.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간밤에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잤는데도 깔끔하게 일어났다. 아침 식사는 역시 숙소 사장님이 챙겨 주셨다. 손수 구운 빵, 직접 만든 잼, 스크램블드 에그와 프라이드 에그, 아이를 위한 팬케이크까지.
할아버지는 무슨 황금배합률이 있는지 사과주스와 구아바 주스를 섞어서 말도 안 되게 맛있는 주스를 내놓으셨다. 더블 에스프레소. 커피마저 아주 훌륭했다. 이 숙소는 밥 먹으러라도 다시 올 거야 내가. https://maps.app.goo.gl/QW6vcpLaweEfvuHR8
포도밭에, 와이너리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직접 섭외해주셨다. 물론 우리는 프랑스어는 못 하니까 영어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 멀지 않은 포도농장. 일요일은 포도밭들이 대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 첫날 돌아봤어야 했던 거구나.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권해주는 대로 가야지.
우리가 차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할아버지가 태워다주셨다. 10분 거리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탔는데...시골길 10분이면 보통 거리가 아니다. 11킬로미터. 걸어가면 두 시간 반...
우리가 간 곳은 샤토 도스몽 Château d'Osmond. https://chateaudosmond.com/# 포도밭 면적이 10헥타아르, 귀여운 규모다. 물론 3만 평이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르도에서 가장 큰 샤토 Château Montrose가 95헥타르 넓이 포도밭을 가진 것과 비교해보면 아기 수준이다.
도착하니 역시 할아버지 농부와 (아마도)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프랑스어 억양이 강한 영어는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으나, 다행히 어려운 얘기를 하지는 않으니까. 이 분도 우리 발음이 낯설 테다. 오늘은 영어 울렁증은 넣어둬도 좋겠다 서로가.
할아버지의 소개가 이어진다. "이곳 땅은 자갈이 꽤 섞인 모래입니다. 물이 잘 빠져서 좋은 포도를 생산합니다." 마실 줄만 알았지 포도나무가 어떤 땅에서 잘 자라는지 알 게 뭐였단 말인가. 포도나무는 진 땅은 안 좋아하는구나.
포도밭으로 나가니까 나무 한 줄마다 어떤 품종인지 하나하나 팻말이 붙어 있다. "한 품종만 기르지 않습니다. 여러 품종을 길러서 섞은 다음 포도주를 만듭니다. 대개 메를로 55%, 까베르네 소비뇽 36%, 쁘띠 베르도 9% 정도를 섞습니다." 이것도 몰랐다. 한 농장에서 포도 한 품종으로만 술을 담그는 줄.
"우리 농장은 포도 나무 줄 사이가 1미터입니다. 폭이 좁은 편이죠. 어떤 곳은 2미터 간격을 두고 나무를 심기도 합니다."
나무를 배게 심으면 포도가 덜 달린다. 나무들이 땅 속 영양분을 나눠 흡수하니까. 그래도 품질 관리에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기후에 따라, 품종에 따라, 또 농장주의 성향마다 여러 선택이 가능하겠다.
포도나무는 묘목처럼 보이는 놈도 있고 늙은 나무도 있다. 늙은 나무는 몸통이 뒤틀리고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다. 늙은 나무를 왜 그대로 둘까? 아무래도 포도가 덜 열릴텐데.
"나무가 3살이 넘어야 포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젊은 나무에 포도가 더 많이 열리죠. 오래된 나무에는 포도가 덜 달리는데 그렇다고 무조건 뽑아내버리지는 않습니다. 죽은 경우에만 뽑아냅니다. 오히려 늙은 나무에서 나는 포도가 더 질이 좋습니다. 더 달아요. 포도송이는 덜 달리는데 그 대신 땅 속 깊이 내린 뿌리에서 뽑아올린 영양분이 집중되니까요."
아 늙은 나무가 오히려 낫구나. 오래된 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는 당도, 산도, 타닌 등이 더 균형 잡힌 경향이 있어서 맛이 더 복잡하고 아름다운 와인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나. 나무가 50살이 넘으면 생산량은 크게 줄어들지만, 늙은 나무에서 딴 포도만 모아서 만든 포도주가 더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사람도 나이 들수록 더 복잡하고 더 균형 잡히고 더 아름답고 더 지혜로워지면 좋으련만. 노인의 지혜란 농경사회처럼 경험이 중요하던 시기에나 통하던 말 아닌가 싶다. 이젠 단순 지식은 검색엔진으로 뒤질 필요도 없이 인공지능에게 물으면 된다. 지혜란 무엇인가?
"우리 농장 포도나무 평균 나이는 35살 정도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평균 수령이란다.
"포도나무 줄 옆에 장미가 한 포기씩 자라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러 심은 겁니다. 왜 심었을까요?" 아니 이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퀴즈를. 아마도 손님들이 거의 매주 찾아올테니 흥미를 잃지 않게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나보다. 장미 심은 이유를 내가 알 리가 있나. 보기 좋으라고?
"물론 보기 좋기도 하지만 아주 실용적인 목적이 있어요. 말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던 시절에 사람이나 말의 실수로 포도나무가 부러지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쟁기질 하다가 이랑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말이 방향을 틀면 말발굽이나 쟁기날에 나무가 상하는 거죠. 그런데 가장자리에 빨간 장미를 심었더니 훨씬 도움이 됐던 겁니다. 끝부분이 잘 보이기도 하고 장미 가시 때문에 말이 돌다가도 찔리면 놀라서 한두 걸음 더 가게 되니까요."
와 삶의 지혜. “그리고 벌레들이 포도보다는 장미에 먼저 생깁니다. 새벽마다 일꾼들이 포도밭에 나오면 장미부터 살핍니다. 장미 잎에 진딧물이 생겼는데 방치하면 반드시 이틀 사흘 후에 포도밭으로 번지거든요."
일종의 조기 경보 시스템이구나. 대단하다. 장미 잎만 앞뒤로 살피면 포도의 미래를 알 수 있다. 점 치는 게 아니라 이건 과학이다. 잠수함 속에 카나리아나 토끼를 태우던 것과도, 탄광에서 갱도 안에 작은 동물들 데리고 들어가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유해한 환경 변화를 인간보다 먼저 감지하고 때로는 죽음으로 경고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