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르도의 초겨울은 포도주 익어가는 계절. 포도농장마다 탱크 가득 올해 햇 포도주를 숙성시키고 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장에 내놓는 중이다.
런던에서 보르도까지는 비행 시간이 2시간도 안 된다. 항공료도 저렴해서 대개 왕복 100파운드 이내다. 저가 항공이 아니라 브리티시에어웨이즈를 이용해도 그렇다. 여권에 출입국 도장을 찍기는 하는데 요식행위에 가깝다. 거의 프리패스다.
기차를 타는 방법도 얼마든지 고려할 수 있다. 런던 세인트판크라스역에서 파리까지 유로스타로 이동한 뒤, 파리에서 떼제베를 타고 보르도 생장역까지 가는 방식이다.
파리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역에서 역 사이 이동에만 대략 6시간 정도 걸리겠다. 길다면 길겠으나 기차 여행만의 여유와 낭만이 있고, 공항 검색과 짐가방 무게 재고 가방 갯수 추가할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까지 생각하면 기차가 나을 수도 있다.
우리의 선택은 일단 비행기였다. 우리 가족은 보통 이른 새벽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마지막 비행기로 돌아오는 여행을 선호한다. 그렇다. 놀 때는 앞뒤 안 재고 최대한 열심히 노는 편이다.
런던 개트윅 공항까지는 개트윅 익스프레스 열차를 이용한다. 빅토리아 역에서 개트윅까지 직통으로 쏘기 때문에 빠르고 안전하고 정확하다. 우리 가족은 열차 멤버십도 사 두었기 때문에 더 싸다. 세 사람이 왕복 45.79파운드. 아이 새벽잠을 좀더 재우기 위해 빅토리아역까지는 택시를 타자. 볼트 호출비 8.1파운드.
저가 항공은 내가 몸으로 때우거나 엉뚱하게 뒤통수를 맞는다. 탑승객이 일일이 여권정보를 입력하고 체크인을 사전에 해야 한다. 이거 잊어버리고 공항에 도착했다? 현장 체크인 비용을 내야 한다.
사전 체크인 과정에서 좌석을 미리 지정하고 싶은가? ㅇㅇ 돈을 내라. 돈을 아끼고 싶다고? 그럼 일행과 떨어져 앉도록 좌석 배정을 해도 불만을 갖지 말라. 아니면 능력껏 옆자리 승객에게 양해를 구해서 자리를 바꾸거나.
저가항공 비행기에는 의자 아래 들어가는 작은 배낭 정도만 갖고 탈 수 있다. 기내 가방을 추가하거나 수하물을 더 싣고 싶은가? 하나하나 다 비용이다.
가족 여러 명이 장기간 여행을 하느라 짐가방을 많이 끌고 다니게 되면? 배보다 배꼽일 수 있다. 잘 따져보고 항공편을 예약하는 편이 좋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저가항공은 싸지만 비싸다.
보르도 공항은 뭐랄까 군 단위 완행버스 정류장 같은 느낌이다. 서울이나 광역시의 으리번쩍한 종합터미널이 아니라. 작고 아담하고 붐비지 않는다. 출입국사무소 직원이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안개가 깔렸다. 하늘 위에서는 선글라스를 사야겠다느니, 선크림을 발라야겠다느니 했는데. 가론강과 대서양에서 피어오른 수증기가 안개가 되어 보르도 일대를 감싼다. 겨울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안개가 끼는데, 때때로 대기오염물질과 섞이면서 강력한 스모그가 발생하기도 한다나.
사정상 아내는 따로 곧장 와이너리로 이동. 나와 딸은 뚜벅이 여행자 모드.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버스를 탄다. 버스표는 버스 기사에게 바로 결제. 두 사람 버스비로 15유로를 냈다. 런던에서 지내다가 환율이 상대적으로 싼 유로권으로만 와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공항에서부터 논스톱으로 달린 버스는 보르도 생장역 정류장에서 멈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아이와 걸어서 도착한 곳은 Place de la Victoire. https://lemap-bordeaux.com/map-listing/place-de-la-victoire/ 승리 광장쯤 될까.
17세기에 세웠다는 석조 아치 포르트 다키텐이 서 있다. 파리의 개선문이나 로마의 포로로마노에서 봤던 개선문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국가적인 큰 의미를 가진 건축물도 아니다. 그저 도시의 외곽을 나타내는 용도였다고 한다. 주변 지역에는 중동계 인구가 많아 보인다.
이때만 해도 몰랐지만 우리는 개미지옥에 들어선다. 다키텐 문 뒤쪽으로 긴 골목이 열려 있다. 뤼 생 캐서린. 유럽에서 가장 긴 보행자 전용 도로. https://lemap-bordeaux.com/map-listing/rue-sainte-catherine/ 이 사이트에는 "토요일에는 이 거리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써 있다.
걸어들어갈수록 과연 거리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빽빽하다. 한창 시절 좋을 때 명동 거리가 그랬듯이. 무려 1864년에 보행자 전용길로 지정되었다는 이 길은 보르도의 영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자 여행자와 쇼핑객을 끌어모으는 매력 포인트다. 갤러리 라파예트와 각종 고급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쇼핑에 관심 없는 나는 이 거리의 건축물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주변의 건축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주로 석회암이 사용되었는데 일부 건물 외벽은 시커멓게 착색되어서 지저분해 보였지만 대부분은 잘 관리되어서 멋스러웠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맛 없기 짝이 없는 런던 음식에서 해방된 기념으로 맛집을 찾아가려 했으나 구글신의 노여움을 샀는지 실패. 괜찮아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간다. https://maps.app.goo.gl/y9E3uU74gFqeADh16
연어가 들어간 크림소스 국수에 화이트 와인 한 잔, 아이는 버거와 주스. 배가 고파서인가 프랑스 음식이어서인가. 너무너무 맛있게 먹었다. 식사량이 적은 편인 아이도 게눈 감추듯 클리어. 새벽에 집에서 나온 뒤 오후 1시가 넘어서 먹은 식사라서 맛있었을 수도 있다. 여튼 우리는 대만족.
자 배를 채웠으니 또 가 봐야지. 다음은 성당이다. https://www.cathedrale-bordeaux.fr/
외관을 보고는 아이는 시큰둥. 파리에서 노트르담도 봤고 런던에서 워낙에 멋스러운 건축을 많이 봐서겠지. 그래도 들어가봐야지? 아빠가 건축물 들여다보는 걸 워낙 좋아하는 걸 아는 아이는 투덜대는 것 같으면서도 잘 따라온다. 고맙다.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장미창은 아주 인상적이다.
천장은 벽돌 구조가 드러나보였는데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시기에 이 건물을 올리면서 어떻게 지붕을 이렇게까지 아름다우면서도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올릴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상상해보라. 당신은 보르도 주변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고된 노동에 지쳤지만 일요일에는 교회를 찾는다. 글을 배운 적은 없다. 눈 앞에는 거대한 아치형 창문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이 쏟아져들어온다. 옆에서도 장미창이 빛난다. 황홀경에 빠질 때쯤 등 뒤에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웅장한 음악을 토해낸다. 종교적 신념이 깊지 않더라도, 이런 순간이 얼마나 큰 희열을 주었겠는가.
시큰둥하던 아이는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촛불을 하나 켜도 되느냐 묻는다. 기도할 게 있구나. 종교는 딱히 없지만 누구나 뭔가 바라는 것 피하고 싶은 것은 있게 마련이다. 그래 초를 하나 사서 켜렴. 입장료도 없는데 우리 이 위대한 문화 유산에 뭔가 기여를 하자. 아이는 뜻밖에 진지하게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끝내 비밀이란다.
독립된 종탑도 인상적이다. 페이 베를랑 타워. 올라가면 보르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데. 굳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 그곳 뿐이랴.
잠시 휴대전화를 충전하러 애플스토어에 간다. 전화기가 꺼지면 큰일이다. 버스나 트램을 탈 수도 없고 지도를 찾을 수도 없으며 뭘 먹고 마실 수도 없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애플스토어 2층으로 올라가서 아치형 창밖을 바라보니, 어? 저게 대극장 건물인가보다. 뜻밖의 뷰포인트.
대극장 건물도 보르도가 얼마나 화려하게 빛났던 도시였는지를 보여준다. 석회암 건물이 잘 관리되면 황금색으로 빛난나더니. 오후 4시가 넘어서 살짝 기운 햇볕을 받은 대극장 건물이 아름답다. 입구에는 12개의 거대한 코린트식 기둥이 돋보이며, 그 위에는 아홉 명의 뮤즈와 세 명의 여신(유노, 비너스, 미네르바)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https://maps.app.goo.gl/W28n35TsDzMie73k7
대극장 내부로 들어가서 간단히 둘러봤다. 내부는 의외로 소박하다는 인상을 준다. 우린 화려한 것들을 너무많이 보아 왔다... 언젠가 이곳에서 공연을 보는 날이 있을까? 극장 안내 책자를 보니 한국인 음악가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3월 14일에 소프라노 박혜상이 무대에 오른다.
3월 17일엔 예브게니 키신도 오네? 와... 아쉽지만 내년 봄 유럽 공연들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자 이제 거울광장으로. https://maps.app.goo.gl/P8Z6jJqhWCNyhtou5 해가 질 때쯤 그렇게 아름답다고 해서 왔으나. 겨울엔 물을 빼놓는군요? 대실망.
그러나 1755년에 지었다는 광장 너머 건물들은 위용이 대단하다. 그 시절 포도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경제, 그리고 해상 무역이 얼마나 번성했던 것일까. 부내가 철철 난다. 그 건물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데 느낌있다.
자 이제 와인박물관으로 가자,했으나. 트램이 오질 않는다. 30분을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는다. 구글맵에서는 이미 한번 왔다 갔다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로군. 와중에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진다. 그냥 안개가 아니라 목이 따끔거리는 게 영 좋지 않다. 서울 초미세먼지의 추억...이제 그만 숙소로 가자. 숙소는 시골마을에 있다고 했으니 공기가 좋을 거야.
어느 와이너리 근처에 있는 숙소까지는 차로 장장 1시간 거리. 음 차를 빌려야 했구나 우리. 후회는 소용 없다. 볼트를 부르자. 67유로. 편안하게 숙소로 골인.
다행히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다. https://maps.app.goo.gl/QW6vcpLaweEfvuHR8 농가주택 느낌인데 소박하고 정겹다. 수영장도 있어서 여름에 오면 정말 좋겠다. 주인 할머니는 정말 선한 인상이시고 할아버지도 좋은 분이다. 딸 아이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나오는 분들 같아."라고 했다. 그래 여행 프로그램에서 환하게 웃어주시는 시골 노인 부부들의 인상이 저렇지.
그리고 음식. 와 최고였다. 나는 연어 스테이크와 와인. 아이는 치킨과 주스. 감탄 연발하며 먹는데 딱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사진은 첫번째로 나온 수프밖에 없다.
후식으로 주신 사과파이까지 모든 걸 직접 만드신 할머니 사랑합니다...기억에 오래 남을 식사였다. 추천해주신 화이트와인도 아주 깨끗하고 가벼워서 혼자 한 병 비우기 딱 좋았다.
보르도 가서 왜 포도밭에 와이너리에 안 가느냐고? 우리에겐 하루가 더 있다. 꽉 채워서 하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