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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기념주간 스톡홀름 여행

by 런던 백수 Dec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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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들 말렸습니다. 아이의 절친 L의 엄마인 호주인 H는 "스톡홀름을 간다고? 내가 거기 해가 몇 시에 지는지 알려줄게. 2시 45분이래."라며 놀렸습니다. 런던은 추워봐야 영상 2도 수준인데 스웨덴은 엄청 추울 거라면서요. 알아 안다고. 그래도 가기로 했습니다.


12월 10일 오전, 우리는 스톡홀름으로 날아갑니다. 맞습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 받은 그 날입니다. 노르웨이항공을 타고 갔는데 앞자리 의자에 써 있는 문구마저 '문학 전용'? 이상한 거 넣지 말라 문서만 넣으라는 뜻이겠으나. 나 혼자 반응합니다. ^^;

아이 학교 담임 선생님 D가 마침 스웨디시입니다. 가서 뭘 해야 하느냐 물으니 미트볼을 꼭 먹으라 하셨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음식점부터 갑니다.


Bistro Bestic. 창 밖 거리 풍경이 예쁘고 실내도 느낌 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북유럽 감성은 묘하게 편안하면서도 실용적이고 따뜻합니다. 플라스틱 사용은 최대한 피하려는 노력이 치열합니다. 대단해요.

미트볼과 매시드 포테이토, 그리고 저 예쁜 붉은색 절인 과일. 해산물 러버인 내가 고른 음식은 연어. 토마토 소스에 연어와 감자와 조갯살과 새우살이 넉넉히 들어갔습니다.

간결한 차림인데 맛은 아주 훌륭합니다. 일단, 간이 맞아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심심한 런던 음식과 비교하면 스웨디시는 약간 짜다 싶을 정도입니다.


배를 채우고 우린 시상식장으로 갑니다. 스톡홀름 콘서트홀. 아 물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까요. 그래도 워낙에 역사적인 순간이니 밖에서 분위기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조명이 멋드러지게 장식되어 있군요. 한국 방송사 기자님들이 콘서트홀 외경을 배경 삼아 생중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이크 대신 컵을 들고 찰칵.

1인 시위하는 분도 있습니다. 모두를 철렁하게 했던 윤석열 얼굴을 히틀러처럼 그려놨네요. K팝 K푸드 K드라마 K코스메틱 등등 분위기 참 좋았는데. K파시스트라니...씁쓸합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역설적으로 더욱 빛나게 만드는 엄청난 사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024년에 비상계엄이라니요? 무장한 군인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다니요? 국회가 발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면, 무장 군인들이 부여받은 임무에 과몰입했다면, 어쩌면 여의도 거리에 수많은 '동호'들이 나뒹굴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만 딱히 볼 게 없습니다. 추우니까 콘서트홀 바로 앞에 있는 헤이마켓 호텔 로비 커피숍에 가서 좀 쉬어 줍니다. 커피 맛도 핫초코도 훌륭했습니다.

시상식장에 들어갔던 지인이 공식 팸플릿과 연설문 책자를 선물로 줬습니다. 세상에! 가문의 영광입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추위도 가셨으니 노벨상을 주제로 한 여행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스톡홀름 시청사 외벽은 미디어파사드로 물듭니다. 올해 주제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한강 작가 얼굴도 보이죠? 한강 이전에 노벨상을 받은 여성은 딱 120명이 전부였습니다. 11살이 된 따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네 얼굴이 저기에 올라가는 날이 있을까 딸?"


그리고 호텔에 돌아왔는데 저녁 내내 노벨상 기념 연회를 생중계합니다. 웃긴다 저걸 계속 보여준다고?하면서 보는데 그럴 만합니다.

왕실 사람들과 정부 고위 관료들, 세계에서 모여든 학자들과 문인들이 모인 행사입니다. 드레스코드는 화이트 타이. 큰 홀 전체를 채운 식탁 사이로 서버들이 오가며 음식을 나릅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과하게 격식을 차린 느낌이 없지 않으나. 저 행사를 1년 내내 준비할 정도로 공을 들인다고 하니까요.

한강 작가의 발언을 생중계로 지켜봤습니다. 한강 작가가 특유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소감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 넓은 공간이 집중하는 게 신기했습니다.


노벨상의 여러 부문이 있지만 문학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더 온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 공간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한강 작가를 향한 스웨디시들의 애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 공영방송은 생방송 중에 한복을 입은 한국인 번역가와 스웨덴인 남편을 인터뷰하기도 했어요. 동시에 bbc 뉴스에서는 서울의 내란 소식이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기묘한 경험입니다.


2일차엔 스톡홀름 시내를 좀더 둘러보기로 합니다.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은 골목마다 예쁜 상점이 즐비했습니다. 서점에도 가 보고요. 오래된 서점 건물의 계단이 어찌나 예쁘던지요. 한국에 집을 지으면서 저런 색감을 구현하면 어울리려나요?

노벨상 박물관에도 들릅니다. 올해 수상자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군요. 아이는 가만히 설명을 들어봅니다.

한강 작가가 기증한 찻잔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사용한 찻잔이로군요. "하루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한강 작가가 서명한 의자도 전시되어 있고요. 국뽕 같은 거 별 관심 없던 사람인데, 자랑스럽습니다.

감라스탄 골목에 있는 서점에도 들러 봅니다. 서점 중앙 매대는 온통 한강입니다. 서점 주인도 우리가 한국인인 걸 알고는 무척 친절하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비록 읽을 수는 없지만 스웨덴어판 소설 한 권을 사왔습니다.


침몰한 군함을 인양해 전시해둔 바사 뮤지엄에 들러봅니다. 군함을 저렇게까지 화려하게 장식할 일인가요.

기껏 만든 배가 침몰해버렸지만 전문가 집단이 참여한 청문회를 통해 사고에서 교훈을 찾았을 뿐 아무도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건져내서 선체를 복원한 다음 이렇게 멋드러진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사건과 사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후대에 무엇을 남겨주는가. 여러 생각이 듭니다.

한강 작가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도 가봅니다. 외벽에는 엄청나게 큰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현관에도 한강 작가 책을 전시해뒀고요. 스웨덴 사람들은 노벨상 수상작을 많이들 사본다고 하지만 모든 작가가 인기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한강 작가는 수상 이전부터 스웨덴에서 꽤 인지도 높았다고 하더군요. 출판사는 수상 이후 특수를 기대했습니다.

출판사에서 공원을 가로지르니 대형 도서관이 있습니다. 서가에는 수백 년 된 고서가 즐비합니다. 건축물 자체가 규모가 엄청나다거나 눈에 띄게 장식적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여유롭고 개방적입니다. 큰 창가 바로 앞에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싶더군요.

이 도서관은 오래된 책들을 제한 없이 꺼내볼 수 있습니다. 아이도 오래된 화려한 책이 신기합니다. 물론 책 자체가 중요한 내용을 담은 유산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후즈후, 일종의 인명록 같은 책입니다.

모든 정보가 디지털로 유통되는 지금, 도서관 한쪽에 있는 장서 카드 함이 아이는 신기합니다. 그걸 하나하나 뒤져서 책 위치를 찾던 때가 있었단다.

도서관에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가 걸렸군요. 물론 올해 수상자인 한강 작가 얼굴이 제일 크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저녁은 전통시장에 가서 먹기로 합니다. 광장시장 같은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미슐랭 가이드에 나온 식당이 있군요? 오후 3시 넘어 애매한 시간에 갔더니 대기 없이 바로 입장했습니다만 평소엔 장사진을 치는 곳이라고 합니다.

역시 미슐랭 스타를 받을 만합니다. 음식 모두 훌륭하고요. 와인 추천도 좋았습니다. 기분 좋은 식사였습니다.

노벨상 기념주간, 특히 시상식 당일과 다음날 스톡홀름엔 어딜 가나 한강 작가 얼굴이 걸려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 이 정도의 팬심을 느껴본 바가 없습니다만...기부니가 좋습니다.


감라스탄 크리스마스 마켓은 어두울 때 가야 합니다. 노벨상 박물관 앞마당에서 열리는데 조명이 켜져야 분위기가 살거든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후 2시반이면 해가 집니다. 기념품도 있고 온갖 음식도 있습니다. 정말정말 귀여운 앙증 산타를 기념품으로 샀습니다. 설탕 입힌 아몬드는 아이 손바닥 만한 한 봉지에 7천 원이었던가요? 가격은 북유럽답게 사악합니다.


노벨상 기념주간의 스톡홀름 여행은 아주 좋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한강 작가가 문학상을 받아서 더 그랬겠습니다만. 꼭 그런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 해도 스톡홀름은 좋은 여행지입니다.

스웨덴 음식은 런던에 비하면 정말 맛있었습니다. 물가가 비싸긴 비싼데 미쳐버린 파운드화 환율까지 가세한 살인적인 런던 물가와 비교하면 대단치는 않았습니다. 건축은 장식적이기보다는 소박하고 합리적이고요. 거의 모든 게 굉장히 친환경적입니다.

소품들의 디자인이 인상적인 경우가 많고 색깔을 아주 잘 사용해서 예쁘게 만들어냅니다. 가구도 조명도 딱 적당하게 보기 좋으면서도 기능적으로도 균형 잡인 느낌을 줍니다. 아 이게 북유럽 감성인가, 싶은 순간이 많아요. 심지어 여기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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