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헬싱키행 크루즈에서 부음을 듣다

by 런던 백수

12월 13일 금요일. 스웨덴 스톡홀름을 떠나 핀란드 헬싱키로 가기 전, 호텔에서 아버지와 영상 통화를 짧게 했습니다. 올해 하반기 내내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아버지를 챙기는 누님의 급한 전갈이었습니다.


실은 여행길에 나서도 되나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위중해져 가고 있었으니까요. 언제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정해둔 것들, 꼭 해야 하는 일들은 하나씩 해가면서 상황을 보자,고 한국에서 다독였습니다.


예약해둔 여행을 하기는 하면서도 계속 불안했거든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든 얼굴을 뵙기로 합니다.


"아빠 막둥이 가족들이에요 얼굴 보세요."

"아버지 저희 보이세요? 좀 어떠세요?"


의사소통이 명확하게 되지 않은지 한참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 발음이 뭉개지기 시작하셨습니다. 말씀을 알아듣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주 간혹 발음이 좋으신 때엔 또 의식이 명료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왜 미국말 하느냐. 너 영국 가더니 한국말을 잊어버린 모양이다."하시기도 했고요.


영상통화 속 아버지는 상태를 모니터링하기 위한 온갖 단자가 붙어 있었습니다. 호흡은 가빠 보였고요. 그래도 아버지는 차근차근 우리 세 식구 얼굴을 눈에 담으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힘 내세요 아버지!"


짧은 영상통화는 중환자실 간호사의 제지로 금방 끝났습니다.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한국에서 온 전갈은 "아직은 위독하시다고 할 상태가 아니다"였습니다. 호전될 여지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마음은 무겁지만 일단 우리는 스톡홀름발 헬싱키행 배에 오릅니다. 크루즈는 저녁에 타서 밤새 달려 아침에 도착하는 일정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14일 새벽, 병원에서 가족들을 호출했습니다. 아버지 혈압이 떨어지고 있으니 가족들은 병원에서 대기하시라.


크루즈선은 잠들지 않습니다. 정말로 밤을 새워서 노래하고 춤 추고 먹고 마시더군요. 저는 와이파이 신호를 잡으러 취객들이 가득한 카페로 내려갔습니다.


헬싱키발 인천행 비행기표를 예매했습니다. 가장 빨리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아버지는 연명의료 거부 의사가 명확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걱정보다도 상황은 더욱 빨리 악화되었습니다. 한국 시간 12월 14일 오전 10시 46분. 가족들의 염원과 기도를 뒤로 하고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습니다. 향년 87세.


제가 귀국하는 1월 13일까지는 버티시겠다고 하셨다던데 도저히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신발 가져오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말씀하셨다더니, 결국 병원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나마 누님이 임종을 지켰습니다. 마지막은 편안하셨다고 했습니다.


멍한 상태로 크루즈선에서 아침을 꾸역꾸역 먹고, 헬싱키 항에 하선했습니다. 눈이 내리다가 진눈깨비가 내리다가 하더군요. 거리는 눈 녹은 물로 엉망이었습니다. 걱정만큼 많이 춥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는 오후에 출발하니까 온종일 시간이 남았습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항구에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고 바로 공항으로 가자니 너무 막막합니다. 택시를 불러서 큰 여행가방을 싣고 빗길 같은 눈길을 헤쳐 Oodi 도서관으로 갑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헤매는 와중에도 도서관은 평화롭고 아름답더군요.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뒹굴 수 있는 공간. 편안하게 책에 파묻힐 수 있는 공간. 악기를 빌려주기도 하고 3D 프린터로, 재봉틀로 어떤 창작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천편일률 서가와 책상만 있는 낡은 도서관이 아니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얼굴을 쓰다듬어드리고, 조문을 받고, 발인을 하고, 평생을 사셨던 시골집에 영정사진으로나마 잠시 들르고, 화장을 하고, 시립화장장 봉안당에 모셨습니다.


유골도 남겨두지 말라 하셨지만 차마 그 유언은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아쉬워서요.


장례 이후엔 홀로 남은 어머니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유품을 치우고 집안을 청소하고 아버지 계좌에 연결된 모든 금융거래/세무/임대료와 임차료 등을 정리했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천지네요. 아직 아버지 사망신고도 못했습니다. 신고 후에는 상속 절차도 밟아야겠죠. 남긴 게 많지 않아서 그나마 간소할 것 같습니다만 절차는 절차니까요.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금새 닥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쪽이든 갑작스럽고 황망하기만 합니다.


거실 소파 오른쪽 자리, 늘 아버지가 앉으시던 자리는 아버지 몸피만큼 꺼져 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그 자리에 다시 앉아계실 것만 같습니다.


길게는 몇 년씩 병석에 누워서 고생하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마지막 고통이 짧았음을 위안 삼습니다.


마을 분들, 집안 위아랫분들, 농협 관계자들이 달려와 함께 슬퍼하고 고인을 기억하고 남은 우리들을 위로해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참 좋은 분' '바르고 따뜻하게 살아오신 분'으로 기억하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웠습니다. 가시는 뒷모습으로도 자식들을 가르치시네요.


저는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다시 런던으로 가서 며칠 안 남은 귀국을 또 준비해야겠지만, 돌아와서는 곧바로 복직해서 일에 치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겠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문득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자애롭다고 얘기할 수는 없더라도 늘 안온하셨던 아버지. 자식들이 때때로 엉뚱한 선택을 하고 실수를 하고 거친 길을 돌아가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하셨던 아버지. 특히 늦둥이가 낳은 늦둥이 손녀를 위해 대문 위를 가로지른 감나무 가지에 줄을 매서 그네를 달아주시던 아버지. 기억하겠습니다.


고통 없는 곳에서 이젠 편히 쉬고 계시길요. 올려보내드린 여권 들고 이젠 불편하지 않은 다리로 성큼성큼 해외 여행도 다니시길요. 사랑합니다.

keyword
화, 목 연재
이전 12화노벨상 기념주간 스톡홀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