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저기압이면 떡갈비 앞으로
주말 내내 실습에서 탈락됐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마음이 무거웠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넷플릭스를 틀어놔도 재미가 없고,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워만 있다 보니 별별 상상이 다 들었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겠지.’
‘혹시 이게 하늘이 나한테 보내는 사인이라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래도 혹시 운이 좋으면 학교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도 있겠지.’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사람 걱정의 대부분은 결국 돈, 인간관계, 건강에서 나온다. 그중 지금 내 머릿속을 차지한 건 단연 돈이다. 실습을 마치지 못하면 졸업도 못 하게 되고, 그동안 들인 학비와 생활비는 허공에 날아가는 셈이다.
캐나다 오겠다고 모아둔 돈을 다 써가며 버텨왔는데, 결과물이 없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괜히 나 혼자 돈지랄한 것 같아 기분이 더 안 좋았다.
그런 기분으로 월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학교 프로그램 코디네이터인 Syindia를 만나러 나가는 길에 하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마치 하늘이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Syindia는 인도계 캐나다인이다. 말투가 차분하고 눈빛이 진지했다. 나를 조용히 앉혀두고 물어본다.
“What happened to you?”
나는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말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강사님이 제가 safety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셨어요. 근데 그다음 날 중간고사였고, 저는 평소에 계속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문제없이 넘어가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다른 강사님께 제 스킬을 보여드릴 수는 없을까요? 중간고사도 못 보고 이렇게 탈락된 게 너무 아쉬워요.”
그랬더니 Syindia가 내 워크퍼밋이 언제 까지냐고 묻는다. 나는 2027년 7월까지라고 대답했다.
“시간은 많네.” 그 말에 살짝 불안해졌다. 혹시 수업 다시 듣고 등록금 더 내라고 할까 봐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계속해서 내 상황을 감정에 호소하며 설명했다.
“실습 중에 쉬는 시간도 거의 없었고, 강사님이 계속 저를 불러서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하셨거든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스트레스받는 환경에서 제 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요. 갈수록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쳐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말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다. 강사님과 잘 맞지 않았고, 팀 분위기도 너무 경쟁적이라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내가 더 나약해 보일까 봐 입을 다물었다. 실습을 통과한 친구들도 있으니 괜히 비교당할까 봐 무서웠다.
그런데 Syindia는 이렇게 말한다.
“헬스케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잠을 못 잤다고 해서 안전을 무시하면 안 돼. HCA는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 직업이야.”
강사님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래, 이번엔 예외로 하고 실습 계속해도 돼." 이런 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같이 실습했던 친구들도 다 실수가 있었어요. 강사님도 100%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저도 솔직히 제가 떨어질 줄 몰랐어요. 처음 시작하는 분야였고, 저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지금은 일도 빨리 시작해야 하는 상황인데, 일정이 다 엉켜버렸어요. 너무 슬퍼요.”
그랬더니 Syindia가 “학장한테 물어볼게. 잠깐만 기다려봐.”라고 말한 뒤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 내게 묻는다.
“지금 일하고 있어?”
“아니요.”
“그럼 오늘 Lab 수업 들을 수 있어?”
“오늘이요?” 하고 되물었더니, Syindia는 이렇게 말했다.
“마침 오늘 새로 온 필리핀 Lab 강사가 있어. 첫날이야. 2주만 들으면 되고, Lab에서 통과하면 다른 실습기관으로 보내줄게. 거기서 남은 실습만 마치면 졸업할 수 있어.”
물론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건 지금 실습 기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실습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 기회라도 받은 게 어디인가 싶다. 추가 수업료 이야기도 없었고, 나는 오늘은 유니폼이 없으니 내일부터 수업을 듣겠다고 했다. 내일부터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Lab 수업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처음부터 다시 듣는 건 아니라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새로 오는 Lab 강사는 어떤 사람일까?’
‘같이 듣는 친구들은 괜찮을까?’
이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
내 삶을 사랑하자. 운명을 받아들이자.
범사에 감사하자.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현재를 즐기자. 기분이 저기압이면 고기 앞으로 가면 된다.
요즘 일에 대한 의욕이 예전 같지 않다. 마음 한구석에는 사실 일하기 싫은 마음도 자리 잡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일에서 계속 실패를 겪다 보니, 인생 자체에 회의감이 든다. 내가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다.
문득,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살아야 하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토록 아등바등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삼성의 이재용 같은 사람도 일을 한다. 가진 것도 없고, 앞날이 보장되지 않은 내가 일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돈 걱정도 이제는 내려놓기로 했다. 돈 많은 사람도 걱정하며 사는데, 나는 잃을 것도 없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니까 음식엔 돈을 아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한국마트에 들러 떡갈비랑 참치, 만두를 샀다.
혼자 살면 자나 깨나 “오늘 뭐 먹지?”가 제일 큰 고민이다. 내일 아침엔 밥에 참치를 비벼 김이랑 먹을 거다. 점심으로는 사과랑 바나나, 아몬드 넣은 요거트를 싸가기로 했다.
오늘 하루도 롤러코스터 같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다.
그거면 됐다. 오늘도 나는 나를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