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판 미생
출근길은 오늘도 서바이벌이었다. 출발은 분명 같았다. 같은 시간, 같은 정류장, 같은 노선. 그런데 오늘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601번을 타고 있었는데, 잠시 멈췄던 환승역에서 다른 버스가 더 빨리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내려버렸다. 609번으로 갈아타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609번이 오지 않았다는 것.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계속 앉아서 기다렸다면 도착 예상 시간은 저녁 5시. 나는 적어도 4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불안과 초조가 뒤섞였다. 결국 7달러를 내고 우버를 탔다. "한 시간만 늦자"는 마음으로. 다행히도, 겨우겨우 4시 30분 정각에 도착했다.
근데 도착하고 보니 매니저는 내가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뭔가 신입은 실수해도 정직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굳이 인사관리 매니저 헤일리를 찾아가서 "4시 30분에 왔어"라고 실토를 했다. 그러자 헤일리는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그럼 오늘 한 시간 차감하라는 거지?"라고 웃으며 퇴근을 했다. 그 순간 ‘괜히 정직했나' 싶었다. 스케줄러한테는 ‘조금 늦는다’고 말해뒀지만, 쓸데없는 성실이 됐다.
한 가지 더. 이틀 일한 돈이 들어왔는데, 15시간으로 찍혀 있었다. 분명 7.5시간씩이면 16시간이어야 하잖아? 물어보니 30분은 무급 브레이크라고. 오늘은 1시간 지각했으니 또 다음 급여가 깎인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눈치보느라 정직하게 고백한 내가 바보지.
그래도 일은 해야한다. 오늘은 저녁 식사 서빙, 휠체어 보조, 방 데려다 주기, 찜질팩 데우기, Puffer 챙겨주기 등등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샤워 보조도 한 건 했고, 차트 작성도 익숙해졌다. 플로런스와 로나와 일했는데, 플로런스는 2006년부터 여기서 일했다고 한다. “나도 처음엔 캐주얼이었어. 다 거쳐야 돼,”라는 말이 괜히 위로가 됐다. 로나는 나에게 노트를 꼭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 실습 때처럼, 케어 디렉터인 Cathy가 평가한다고 겁도 줬다.
다행히 오늘 스케줄러가 수목금토 시프트가 비어있는데 그때 나올 수 있냐고 물어봐서, 당연히 가능하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럴 때면 타이밍 좋게 기회가 온다.
딱 그 타이밍에, 캐주얼 라인에 ‘임시 정규직 포지션'이 떴다. 현재 임시 정규직이 영구 정규직으로 승급되어서 빈자리가 생긴 거다. 로나랑 플로런스가 나보고 지원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질렀다. 진짜로 정규직이 될지 모르겠지만, 뭐든 해보는 거다.
일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도 험난했다. 버스가 또 안 서는 정류장을 지나쳤다. 공사 중이었고, 임시 폐쇄된 노선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미리 알아차려 30분 일찍 나왔고,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집에도 못 돌아갈 뻔했다.
밤에 돌아오는 길, 노숙자들이 가득한 버스를 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한 날엔 꼭 연예인 사망 소식 같은 게 들린다.
오늘도 그랬다.
예전에 손금 본 적이 있다. 손바닥이 손가락길이보다 길고 선이 깊어서, 이상이 크고 생각이 많다고 했다. 뭘 해도 만족을 못 해서 20대에는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고. 맞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이것저것 도전하고 방황을 오래 한 것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내일도 시프트가 있고, 할 일은 또 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