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가기의 기술
나는 사실, 일보다 “누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누가 고참이고, 누가 이 구역 실세인지, 오래된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걸 슬쩍슬쩍 캐보는 재미가 있다. 약간 병원판 나는 솔로 보는 느낌이랄까?
소개팅 대신 콜벨, 직업 대신 경력 연차가 주요 정보인 세계. 오늘은 LTC 빌딩에서 인도 아줌마 Bandana와 일했다.
“3년 됐어”라는 말에 “어머, 오래되셨네요~” 하고 슬쩍 리액션을 얹었다.
이곳에서는 경력이 곧 파워다. 잘 보이면 좋을 것까진 없지만, 안 보이면 괜히 불편해진다.
그 아줌마는 이 빌딩에서 2년 넘게 일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웬만한 건 본인이 다 했다.
“너 그냥 보고 있어~”라며 웃는데, 그 말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된다고 하니, 괜히 눈물이 날 뻔했다.
오늘은 필리핀 직원도 있었다.
다만 Assisted Living 쪽에서 일하는 분이라 LTC에선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일 없어~ 뺏겼어~” 하며 손을 내젓는 말투가 묘하게 귀여웠다.
종종 보이긴 하는데, 메인으로는 안 나오는 약간 병동의 전설 같은 느낌.
오전 일과는 아주 단순했다.
방에 아무도 없는 거 체크
타월, 티슈 채워넣기
컵 리필
커피 머신 헹구기
주스 갖다주기
샤워 보조
차트 작성
그게 다였다. 게다가 한 시간은 레크리에이션 타임이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도 ‘디저트 꺼내기’ 같은 건 일부러 먼저 해봤다.
사람이 없어도 ‘일하는 척’은 해야 묻어갈 수 있다. 노력 없는 묻어가기는 없다.
South 빌딩은 콜벨 많이 울린다고 해서 겁을 먹었지만, 의외로 평온했다.
감정기복 있는 할머니 한 분, 살짝 공격적인 할아버지 한 분 정도.
콜벨이 떨어져 있는 방도 있었는데, 그건 간호사에게 보고했다.
내가 특별히 뭘 잘한 건 아니지만, “리포트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분이 괜히 좋았다.
이곳에서는 ‘별일 없이 하루 넘기기’도 실력이다.
점심시간엔 직원들과 수다 타임.
아까 Assisted Living에서 봤던 44세 필리핀 직원 Launa와도 얘기를 나눴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말에 자동 존경심 발동. 지금은 쉬운 데만 골라서 일한다고 했다. 아들 둘 있는 워킹맘인데, 외모는 30대 초반.
“너무 동안이세요”라는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민자 세계에서 나이는 비밀이 아니다. 자랑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여기서 정규직 되려면 얼마나 걸려요?”
“보통 1년 안에 다 돼~”
“그럼 이 근처로 이사 와야 하나요?”
“It depends.”
이 한 마디가 모든 걸 요약했다. 느긋하고 귀엽다. 아주 필리핀답다.
같이 밥 먹던 네팔 친구는 이제 4개월 차라고 했다. 이 동네에 산다기에 반가웠고, 샐러드도 나눠 먹었다.
“우리 학교 졸업생끼리 돕고 살자”는 분위기.
서로 정보 주고받고, 정규직 빨리 되는 곳도 공유했다. 이래서 커뮤니티가 중요하다. 결국 살아남는 건 정보력과 관계력이다.
오후엔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갔다.
과일 세팅
주방 정리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눈치 보기
10시에 safety check
퇴근 30분 전, 네팔 친구 남자친구가 차로 집까지 데려다줬다.
기차는 이미 끊겼고, 몸은 녹초였고, 핸드폰 배터리는 1%.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런 게 연줄의 힘이다.
오늘도 잘 묻어갔다.
사람들 구경도 했고, 연줄도 조금 만들었고, 적당히 나서고, 적당히 빠지고, 적당히 살아남았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조금씩, 티 안 나게, 생존 연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