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셋, 적당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익숙한 얼굴들이 저마다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같이 사는 아프가니스탄 친구 소마야가 갑자기 말했다.
“나 일 그만둘까 봐. 모델링 다시 시작하려고.”
예전부터 모델 지망생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 그만둔다니 의외였다.
그래서 그냥 말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해. 인생은 한 번이야. YOLO.”
그 말이 참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무슨 정답이 있겠나.
불안은 다들 안고 사는 거고, 누군가는 그걸 말하고, 누군가는 입 닫고 넘길 뿐이다.
그날 나는 또 다른 룸메이트, 일본인 그래픽 디자이너 하루카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하루카는 백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곧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 날이라며, 회사 사람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전형적인 ‘화이트 오피스’의 생글생글한 웃음 속에서, 하루카만 어딘가 살짝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백인 회사에서 일하면 뭐가 제일 어려워?” 하고 묻자,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딱히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깊게 친해지기는 어렵더라."
그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멀티컬처 환경 속에서도, 마음의 문을 여는 건 여전히 조심스럽다.
웃고, 말하고, 서로 도우며 일은 하지만 그 이상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곳은 일만 함께하는 곳이고, 인생은 여전히 각자의 것이다.
나는 하루카에게 말했다.
“난 팀이랑 일하는 거 별로야. 혼자 일하고 싶어.”
하루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래. 사람들 틈에 오래 있으면 기가 빨려.”
그 대답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우리가 서로 다른 국적, 직업, 언어를 가졌어도,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적당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건 매한가지였다.
소마야는 일본에 놀러 가겠다고 했고, 하루카는 “그럼 나도 그때 일본에서 만나자”며 웃었다.
소마야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일본에서 한국 가서, 지나 집으로 바로 가자.”
우리 셋은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당장 가진 것도, 보장된 미래도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 편안했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하찮은 농담 몇 마디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민자들의 밤은 언제나 길고 피곤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마음 하나로 또 하루를 견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