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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3%, 줄어든 욕망

이상 없음

by K 엔젤

주말에 오리엔테이션이라니.

정식 직원이 되었다는 축하인지, 실습이 다시 시작됐다는 경고인지 헷갈렸다.
무엇보다 걱정됐던 건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실습 때 함께 수업 들었던 얼굴을 마주치진 않을까.
괜히 나 여기 취직했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잘난 척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있고 싶었다.

이런 마음의 바닥엔,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은근한 거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인도 사람들은 아시안은 무시하고 백인에게만 친절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인도 사람들 앞에서는 괜히 긴장하게 되고, 그들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편견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조금 더 철이 들면, 이런 마음들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겠지.


그 와중에 백인 레크리에이션 직원이 말했다.
나는 필리핀 직원들 너무 좋아, 그들 없으면 안 돼~”


칭찬이었지만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 말속엔 ‘우리가 너희를 좋아해 줄게’라는 묘한 상하관계가 숨어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여전히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내 모습이 조금 서글펐다.


출근길에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물어보자, 직접 해보자, 웃자, 친절하자.”

하지만 막상 현장에 서니 손이 떨렸다.
이름도 모르고, 상태도 모르고, 약도 모르겠고.
실습 때 안전 점수에서 탈락했던 기억이 자꾸 떠올라 더 긴장됐다.


그때 AMA라는 인도계 아줌마가 다가와 물었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이야?”


자기가 알려주겠다며 무전기와 핸드폰을 챙겨서 함께 올라갔다.
그녀는 “To Do List 들고 직접 해봐야 늘지”라며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날은 우리 학교에서 실습 나온 인도 학생도 함께였다.


내가 약을 들고 긴장하고 있을 때, 조이가 나타났다.


“너 어디 있었어?”


오피스에서 날 못 봤다며 연락까지 돌렸다고 했다.
알고 보니 어제 일한 곳은 다른 빌딩이었고, 오늘은 LTC 건물로 바로 갔어야 했다.
나는 조이가 안 보여서 오늘 안 오는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곳은 한 명이 담당하는 거주자가 3~4명 정도라 실습 때보다 훨씬 낫다고, 조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갑자기 편해졌다.
이 일엔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자, 나도 조금 느슨해졌다.
오래 일한 사람이 “이렇게 해” 하면 고개 끄덕이고, “저렇게 해” 하면 그냥 맞춰주면 되는 거다.
나는 눈치 빠르고 팀워크 괜찮으니까, 그걸로 버텨보자.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할머니를 레크리에이션실로 모시고 가고,
밥 드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몸무게도 재고, 커피도 다시 따라드리고.
“이거 별일 아니지”라고 넘기기엔, 하나하나가 다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살짝 지친 얼굴에 커피 한 잔 건네는 일. 그런 게 쌓여서 관계가 되고, 신뢰가 되겠지.


점심시간엔 직원들이 방 렌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 UMA 아줌마가 조용히 말을 붙였다.
자기 집에 머무는 학생이 곧 나간다며, “너도 들어와서 살아도 돼”라고.

뜻밖의 제안이었다. 한 달에 800불,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라니.

상상만 해도 피곤해서 정중히 웃으며 넘겼다. 그래도 그 대화 속에서 묘한 안심이 들었다.

차 없는 것도, 멀리서 출퇴근하는 것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
이민자들의 삶엔 늘 어딘가 불편함이 껴 있지만, 다들 그 불편함과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후엔 큰일은 없었다.

기록지 정리하고, 프로그램 교육받고, 어깨 아프다는 힐지가 무언가를 적는 걸 지켜봤다.

이따금 팀원들이 내게 묻는다.


“너 여기 홈페이지 보고 왔다며? 우리 많이 뽑는 거야?”
조이가 웃으며 말했다.


“지나랑 Mavis랑, 어떤 남자애 한 명. 총 세 명 새로 들어왔어. 아무나 안 뽑아.”

뽑혔다고 끝이 아니고, 시작도 아니고, 그냥 또 다른 하루일 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핸드폰 배터리는 3% 남았고, 몸은 이미 방전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를 전하고, 유튜브로 개그 영상을 틀었다.

그러다 우연히 강신주 철학자의 영상을 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가진 것을 늘리거나,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


맞는 말이었다.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지만, 원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줄어든 마음 덕분에,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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