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동네에서 살아남기
일을 오래 하려면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결국 집주인에게 연락해 디파짓을 걸었다. 첫 달은 650달러, 다음 달부터는 700달러. 남자 셋이 사는 집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필리핀 여자 두 명도 함께 산다고 했다. 이름하여 ‘다문화 하우스’. 말 그대로 세계화의 결정체다.
집주인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이고 뭐고 다 싫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사실, 인도 집주인이라는 이유로 괜히 선입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제는 국적이 아니라 타이밍이었고, 남보다 내 컨디션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세상 탓보다 나 탓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세상도 낮게 보인다.
며칠 전, 일 끝나고 들렀던 그 집. 지금 내가 일하는 곳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다. 차 없이 통근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지만, 걸어서 출근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동네 이름은 라드너(Ladner). 아시안 인구는 거의 없고, 백인 위주의 조용한 동네다. 벤쿠버 외곽, 사실상 시골이지만, 편의점과 카페는 있고, ATM도 있다. 지금 사는 곳보다 덜 북적이고, 덜 소란스럽다. 도시의 아시아적 풍경은 없지만, 잠시라도 마음을 눕힐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기서의 삶은 조금 냉소적이다. 다문화 하우스, 내 감정 기복, 백인 위주의 시골 동네까지. 하지만 적어도 숨 돌릴 공간이 있고, 걸어서 출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럭저럭 만족한다.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사람은 여전히 피곤하지만, 커피 한 잔과 조용한 동네 길이면 버틸 만하다.
솔직히 말하면, 다들 다문화라고 하지만 결국 집 안에서 제일 치열한 건 ‘누가 화장실 먼저 쓰나’ 경쟁일 듯하다. 세계화보다 시급한 건 화장실 우선순위다. 세상은 거칠고, 사람은 피곤하고, 화장실은 언제나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