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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프 Nov 16. 2019

애증의 동업자들

'동업하면 힘들다던데?', 사실이다.


그들은 너무 쉽게 요식업을 생각했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따르기에 그들은 너무 자존심이 셌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오픈 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프랜차이즈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에 가 보았고, 한국의 K-pop과 드라마를 좋아하는 두 딸을 둔 부부였다. 그들은 이미 레스토랑을 할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임대료도 들지 않으니 남은 일은 좋은 레스토랑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서울치킨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가맹점의 형태로 서울치킨 2호점을 오픈하기로 했다. 요리는 그들의 집에 상주하는 현지 도우미들이 하기로 했다. (설명을 더하자면 인도네시아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산다. 자바 현지인들과 '오랑 찌나'라 불리는 중국 화교들이다. 현지인 도우미를 둔 화교들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인들도 도우미와 운전기사를 두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인건비가 그리 비싸지 않기에 가능한 문화다) 


프랜차이즈의 기본은 동일한 맛이다. 이를 위해 본사에서는 소스와 레시피를 제공한다. 그런데 서울치킨 인도네시아 2호점은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메뉴를 바꿔서 판매했다. 몇 번이고 다시 트레이닝을 해도 잠시 좋아질 뿐 원래대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프랜차이즈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후 두 곳의 가맹점이 더 생겨났다. 4호점은 본점과 똑같이 스마랑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3호점은 1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진 살라티가(salatiga)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인 세 명이 함께 투자를 해 오픈한 곳으로 한 명은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곧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동업자들끼리 싸움이 났다. 이 일 이후 세 명 중 두 명은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머지 한 사람도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장이 없으니 그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인터넷이 안된다는 이유를 들며 (물론 실제론 잘 됐다. 직원들이 연결을 안 했을 뿐이지) CCTV를 끊어버리더니 직원들의 횡령이 시작됐다. 결국 얼마 못가 가게는 문을 닫았다. 온전히 돌아가는 곳은 4호점 뿐이었다. 



총 세 곳의 가맹점이 오픈 1년 전 후로 생겨났던 인도네시아와 달리 대만은 오픈 후 1년이 지나도록 프랜차이즈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간 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현실화되진 않았다.) 그래도 다들 1년 버틴 게 용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의 오래된 식당들도, 대만 현지 프랜차이즈 식당들도 6개월을 버티지 못한 채 이 마을을 떠난 상태였다. 


타이베이와 달리 뤄동진에는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많았고, 1인 가구보다 대가족이 많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치킨보다 갈비탕을 먹는 어르신들이 주로 있는 동네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 곳에서 계속 식당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이베이에 사는 친구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날아왔다. 타이베이 동문 역(타이베이 유명 관광지 융캉제 거리가 있는 지역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 역과 비슷하다) 주변의 한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타이베이에서 한 달간 머물며 이 곳 저곳의 월세를 알아보았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곳의 월세가 3만 5000대만 달러(한화 약 140만 원)라는 말을 듣고 솔깃해졌다. 융캉제에 있는 한 곳의 월세는 한화 700만 원인데 비해 이 곳은 한화 140만 원이었다. (물론 크기는 더 작긴 하다) 


함께 하자는 데 안 할 이유는 없었다. 몇 번의 현장 방문 끝에 우리는 계약을 맺었고, 그렇게 '서울치킨 타이베이'가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탄생했다. 가맹점으로 오픈했으면 좋았겠지만, 타이베이의 부동산 가격이 워낙 비싼 데다, 남편은 뤄동진에서 서울 치킨을, 동업자 1에겐 다니던 직장이 있었다. 그래서 동업자 2가 총대를 매고, 요리와 가게 운영을 맡았다. 프라이드치킨의 경우, 트레이닝의 기간을 거치면 웬만큼 요리할 수 있고, 메뉴가 다양한 본점과 달리 타이베이 매장은 치킨과 떡볶이라는 단일 메뉴였기에 분업이 가능했다. 


오픈 하자 소위 '오픈 발'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높은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기존의 매상에 미치지 못하는 판매고를 기록했고, 남편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업자들은 경험자인 남편의 의견을 묵살하고 본인들의 생각대로 경영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프라이드치킨은 주로 밤에, 야식으로 먹곤 한다. 그런데 이들은 점심에 직장인을 타깃으로 판매하고자 했다. 직장인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1시간을 치킨 먹는데 쓴다? 한국에서도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모여서 치킨 한 마리 먹는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다. 패스트푸드점이면 모를까.


이런 우리의 말을 이해하긴 하는 건지 그들은 원래 3시부터 10시까지 하기로 했던 영업시간을 오전 11시 30분부터 저녁 8시까지로 변경했다. 한국이라면 가장 많은 주문이 들어올 7~8시 타임에 이들은 라스트 오더를 받고 장사를 마감하고 있었다. 이러니 잘 될 리가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뀐 운영 시간은 매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만인들도 점심식사로 치킨 먹긴 부담스러운 것이 틀림없다.) 


결국 한 달 간의 모험을 끝으로 운영 시간은 오후 4시부터 9시까지로 확정되었다. 


다음은 메뉴가 문제였다. 한국에서 프라이드치킨은 마리로 판매된다. 하지만 우리의 애증의 동업자들은 이걸 또 나눠서 2조각씩 판매하고 싶어 했다. 타이베이의 1인 가구 수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업자들의 의견을 들어주어야 나중에 다른 의견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해보라고 했다. 2조각을 판매하면서, 조각마다 소스를 따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비까지 베풀어 놓았다. 이쯤 되면 장사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환원하려고 가게를 열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들은 소비자의 입장으로, 남편은 사장이라는 입장이 더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장님이 되는 순간 새는 돈을 막고, 메뉴에 집중해 판매하고 더 높은 매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야 정상인데, 이들은 아직도 손님의 입장 측에 서있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고, 매달 이윤은커녕 각자 주머니에서 공금을 착출해야 하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시작되는 것이 구조 조정이다. 우리 같은 소상공인에게도 구조 조정이 필요했다. 가게가 크지 않고, 매상이 높지 않은 만큼, 직원이 2명 상주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에 남편은 직원을 1명만 두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이유는 직원이 자신의 친구 남편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지금 '뭣이 중한디'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겐 무엇 때문에 가게가 잘 돌아가지 않는지 훤히 보이는데 동업자들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경험이 없으면 경험자의 의견이라도 귀를 열고 들어 주면 좋을 텐데, 그놈의 똥, 똥 자존심이 문제다. 


모르면 따라오던가.


Photo by Park Trooper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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