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 주로 한국인 동료들과 소통하므로, 영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은 잊을만하면 가끔 나타난다. 사장님에게 브리핑할 때, 해외 직원들과 화상 회의할 때, 다른 한국인 직원이 영어로 유창하게 발표하는 걸 볼 때 등. 그때마다 다짐한다.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지!’ 이미 수백 번도 더 했던 다짐이다. 그런데 왜 내 영어실력은 여전히 그대로인가. 아직은 이 정도로도 먹고살 만해서? 사장님 질문에는 늘 팀장님이 답하니까? 기술이 발전하는 요즘, AI가 해결해 줄 테니? 아니면 마음 한구석에 영어로 일하지 않는 곳으로 이직하겠다는 꿍꿍이라도 있는 것인가..!?
얼마 전 TV 예능에서 출연자가 쓸데없이 영어를 섞어 말해 조롱받기도 했었다. 추측건대, 그는 단지 근무 환경의 지배를 받은 사람일 뿐이다. 나 역시 영어 자료를 만들고, 영어 공지를 보고 듣고 하다 보니, 어느덧 말할 때 영어를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회사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으나, 가끔 한국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영어도 아직 한참 부족한데 유창했던 한국어마저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잠시 내적 갈등이 일어나곤 한다.
물론 그런 이유로 영어공부를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벼락치기 습관이 영어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 영어공부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지만, 타고난 그 성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벌써 두 달이 지난 것이다. 만약 한 달 뒤 해외 출장이 잡혀있다면 지금쯤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뚜렷한 목적 없이는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비효율적이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내 영어실력은 평생 제자리일 것이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습관을 확 바꾸던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던지.
첫 번째는 습관을 바꾸는 방법이다. 내 MBTI 마지막 글자는 P다. P는 즉흥적인 성향으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보다는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것을 선호하는 유형이다.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벼락치기 스타일이다. 성향을 바꾸려면 J가 되어야 한다. J가 되어 계획적으로 살며 영어공부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사실 새해에 J가 되어보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자괴감을 느끼다가도 이내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P가 어때서?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짧은 시간 집중해서 일한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 말로는 J가 될 거야라고 했지만, 알고 보면 나는 내 P유형에 꽤나 만족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습관 바꾸기는 이쯤에서 패스.
두 번째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이다. 내 성향은 유지하되, 영어공부를 하나의 루틴으로서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다. 먹고, 씻고, 자고는 매일 하는 일이니, 그 루틴의 바로 옆에다 영어공부를 찰싹 붙이는 것이다. 습관이라고 느낄 새도 없이 일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일종의 세뇌하는 방법이며 눈을 가린 타협이다.
그런데 이런 눈속임이 과연 돈 들이지 않고 가능할까? 나의 과거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마 며칠 하다 관둘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스스로 힘들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루틴으로 만들어야 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꾸준히 할 수 있게끔 말이다. 비싼 영어학원에 등록해서 금융치료로 해결하는 것이다.
내친김에 인터넷 창에 영어학원 아침반을 검색했다. 후기를 보니 좋아 보였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강남역까지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배고플 것 같은데.. 필요하면 그때 등록해도 될 것 같은데..’ 내 원래 성향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다. 습관을 바꾸는 것도, 속이는 것도 쉽지 않구나를 새삼 깨닫고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멍하게 있다 불현듯 옛날에 봤던 뉴스가 떠올라 검색을 해봤다. 습관을 바꾸려면 21일 동안 지속하면 된다는 뉴스였다. 그 기간이면 습관 기억세포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3주!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좋은 시간이다. 벼락치기로 열정을 쏟을 만한 기간이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3주 동안 유튜브 영어 강의를 매일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건 코앞의 계획이라 지키기 쉬울 것 같다. 드디어 적절한 공부법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보면 게으른 자의 변명 같기도 하지만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찾아낸 공부법이다. 조금 즉흥적이기는 하지만 내 성향과 최대한 타협하고 내린 결론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이어리에 계획을 적었다. 3주 뒤, 내 영어실력은 분명 조금은 향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3주 뒤 또다시 3주를 시작하면 의도치 않게 꾸준히 영어공부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깜찍한 상상도 해본다.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는 그날까지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