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아니었으나 지금은 맞는 일,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아닌 일들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맞은 일도 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아닌 일도 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인생이려니한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때는 너무 가까웠으니까.
가까이서 세밀하게 지켜보면 더 잘 알 것 같은데, 오히려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졌을 때가 객관적일 때도 많다. 친밀해야 잘 보이는 것이 사람사이 같지만, 거리감을 두고 관찰해야 더 잘 아는 경우도 있다.가끔은 가족이 제일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도 있지만 사람 속을 모르겠다는 속담도, 안과 밖이 다르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겠다.
그때는 몰랐다. 아빠가 나를 그토록 자상하게 아껴주는 줄. 동네 어르신들이 "네 아빠는 너 밖에 모르더라." 하셔도, 아빠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다. 다른 아빠와는 달리 숙제도 해주고 요리도 해주는 아빠라서 엄마보다 더 좋아했지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어보면 대답은 못해도 속으로는 한쪽으로 마음이 더 쏠렸다. 조금은 철이 들어서야 아빠가 당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을 쓰지 않으면서 오직 가족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빠가 안쓰럽곤 했다.
두 남자의 현신적인 사랑?
아빠와의 추억은 대체로 아름답다. 기억이 온전하게 100% 팩트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기억은 포장되고 미화되니까. 고등학생 시절에 아빠와 크게 싸운 적도 있다. " 저 계집아이가" 하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아빠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딸이 아빠랑 싸울 수 있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와 딸이 사소한 문제로 싸우듯 자고 일어나는 문제, 숙제 관련 문제로 나는 아빠와 줄기차게 싸우기도 했다. 조는 모습이 안쓰러워 차라리 자라고 하시는 아빠 말씀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졸지언정 안 자고 버틴 더럽게 말 안 듣는 딸이었다.
아빠는 늘 자상했다. 자상함은 결혼을 하고도 이어졌다. 신혼집에서 직장이 멀지도 않건만 아침마다 오셔서 딸을 직장에 태워다 주시고 출근하셨다. 여행을 좋아하셔서 주말이면 나가시던 분이 손주가 태어나고 여행 한 번을 가지 않으셨다. 손주들이 이쁘기도 하지만, 손주들 때문에 잠 못 자는 딸을 위해 주말이라도 육아를 해주고 싶어 하셨다. 주말 케어는 아빠가 항암치료를 받는 시간에도 계속되었다.
"아빠 힘드신데 오지 마세요. 애들 내가 보면 돼!"
"너도 주말에는 쉬어야지. 네가 쉬어야 아빠 마음도 편해. " 대상포진이 등에 넓게 퍼져도 엄마한테 입도 뻥긋하지 말라시며 손주를 데리러 오시는 날이 반복되었다. 떠난 지 20년이 되었고, 손주들은 이십 대 중반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빠가 그립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남편의 사랑도 넘쳤다.
이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아껴주는 남편은 흔하지 않았다. 남녀 간의 사랑 온도가 오랜 시간 유지되기가 어려울 텐데, 그는 가능한 사람이었다.
특별히 말로 애정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없이 행동으로 애정을 보여줬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오는 걸 싫어하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집안일하기를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청소기를 돌렸고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빨래 널고 개는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아내를 위해 빨래 정리도 자주 했다. 다림질 한 번을 안 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명절 전날 시댁 가는 것을 신경 쓰자, 아이들이 시댁만 가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면서 당일 새벽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명절날 설거지뿐 아니라 음식도 같이 하며 동등하게 명절을 지내고자 노력했다. 남녀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빨리 깨인 사람이었다.
아내가 덕질을 하기 시작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갈 때도 함께 해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본인이 음악을 좋아하니 같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운전하는 이유가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었음을 이혼하면서 알았다. 록페스티벌을 가면, 날이 더워서 서 있을 자신이 없다며 입장하지는 않더라도 데려다 주었고,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리다가 집으로 함께 왔다.
어딜 가나 마음을 써주었고 섬세하게 챙겨주었다. 록페스티벌에 가면 아내는 스탠딩존으로 가버리고 혼자 돗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심심해도 매번 해주었다. 언젠가 친구와 선배언니와 함께 갔을 때,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고 그랬다. "루서야, 너 너무 한다! 남편을 혼자 두고 너만 즐기니." 좋아하는 가수만 눈에 들어와서 덩그러니 혼자 있을 그의 서운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번 같이 가주고 기다려 주곤 했다.
이혼을 말할 때, 그는 미움이 쌓여서 앞으로 함께 하면 더 미워할 것 같다고 했다. 알듯 말듯했다. 알 것도 같은데 이해되지 않았다. 더 미워하지 않기 위해 이혼을 하겠다는 것은 핑계라 여겼다. 달라진 마음을 그렇게 변명하는 것이겠지.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평안해졌을 때,
그제야 내가 밉지 않다고 했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지나간 일을 반추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의미 없는 일인데 내 안에서는 변화가 생겨난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어릴 적 보물상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열어보는 기분이다.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시절의 소중함이 흐릿하게 떠오르며 행복해진다. 버려도 괜찮고 잊혀도 별 다를 일 없는 기억이 한없이 소중해진다. 상처의 터널을 지나며 사랑받은 기억이 없었는데, 가장 중요한 두 남자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존재였다는 자각. 지나간 일의 반추는 아름다워졌고,내 심장에 다시 쓰였다.
오랜만에 톡을 보냈다.
'지나고 나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며. 고마울 때가 많았는데 몰라주고 살았다고. 결혼생활이 좋은 기억이라 다행이라고.'
'둘 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고. 나 또한 고마운 기억이 많다'라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별 후에도 과거의 공유가 기분 좋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 잘 살 온 것 아닐까. 3년의 연애와 23년의 결혼생활. 26년을 함께 해온 사람과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는지.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 스물세 살의 나는 첫눈에 그에게 반했다. 세 번째 밥 먹을 때까지 젓가락질이 힘들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떨리는 손짓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 앞에서 거의 먹지 않을 정도였다. 그토록 떨렸던 첫사랑과 연애했고 결혼해서 잘 지냈다. 이별 후에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괜찮은 사랑이었다.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면 비빌 언덕이 든든해서 세상을 향해 좀 더 날개를 펼치고 나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사랑이 사무칠 줄 알았으면 일찍 효도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아쉬움은 시간이 한참 흘러도 미련으로 남는다. 죽음이란 종결과 달리 딸은 아빠의 사랑을, 손주들은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끝이 없는 듯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 남은 기억이 아직도 든든하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게 될 것들도 조금은 안다. 그때 맞았던 일이 지금도 맞기를 바라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때는 틀렸더라도 지금은 맞는 일의 고마움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