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일을 받아놓은 소 같다, 고 영철은 생각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축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그날이 와서야 겨우 알 수 있지만 그는 몇 주 전부터 자신의 도축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전자의 경우가 더 편할지도 모른다. 알아서 최후를 준비해 주는 소와는 달리 영철은 자신의 마지막을 직접 선택해야 한다. 멍청한 동물은 소식을 들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도, 시체를 보고 충격에 빠질 목격자의 곤란함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죽는 와중에도 자잘한 걱정에 빠진 자신의 소심함에 몸이 떨릴 정도로 질색하는 그였다.
삶이 성공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름대로 괜찮은 직장에서 만족할만한 급여를 받는다. 주말에는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가고 일이 끝나면 코젤 다크 4캔을 사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른 흑맥주는 써서 마시지 못하지만 코젤 다크만은 입맛에 맞는다. 좋아하는 맥주잔에 한 캔을 모두 비우면 잔이 넘치기 직전의 꽉 찬 상태가 된다. 넘치지 않게 조심히 들어올려 조금씩 홀짝인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보기도, TV를 켜 멍하니 잡념에 빠지기도 한다.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어쩌면 평균 이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삶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별히 힘들게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지쳤을 뿐이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사는 게 힘들다. 그들의 야릇하고 끈적한 농담에 웃기지도 않은데 허허 웃어 보이는 자신이 싫다. 거울에 비친 눈은 20대 때의 장대한 꿈으로 반짝이던 빛을 잃어가고 있다. 어렸을 때 지금 나이의 그를 그려보면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듬직하고 따뜻한, 그럼에도 빛나는 순수함을 잃지 않은 어른이길 바랐다. 지금의 그는 원치 않은 회식의 반복으로 이 부장의 것처럼 기형적으로 볼록해져 가는 배와 빠져가는 머리를 겨우 붙잡아 놓은 아저씨가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남의 기대에 맞춰 가면을 바꿔 쓰는 경극배우에 가까웠다. 지금과는 반대로 꽤 명랑했던 영철의 어릴 적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님은 그의 쾌활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러나 웃는 모습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부모님이 싸울 때가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싸워 어머니가 맞은 날에는 활기찬 자신을 숨기고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들 때까지 침묵하는 가면을 써야 한다. 그들이 화해하면 금세 가면을 벗고 활기찬 얼굴로 돌아갔다. 그의 기분은 중요한 게 아니다. 싸움이 끝났음에도 침울해져 있다간 또 다른 싸움의 불쏘시개가 될 것이 뻔했다. 해맑은 영철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애교를 부리며 환기한다.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지면서 그는 침묵의 가면을 꺼낼 일이 많아졌다. 반복해서 쓴 침묵의 가면은 얼굴에 너무 가까워져 떼어 내기 힘든 것이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단련된 눈치 덕분인지 사회생활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남들이 원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그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상대방의 좋은 일에 깔깔 웃기도, 슬픈 일에는 자신의 일인 양 길길이 날뛰기도 하는 영철을 모두가 좋아했다. 영철은 그들의 희노애락에는 관심 없었다. 미움 받지 않기 위한 영철의 무기일 뿐이다. 작은 단점이라면 가면을 바꿔 쓰는 일에 익숙해지니 그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는 돌아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24시간 동안 누군가가 지켜보는 관찰예능을 평생동안 찍는 것 같다.
30대가 되어서도 영철의 가면극은 끝나지 않는다. 아저씨라 불릴 나이가 됐음에도 신입의 눈치를 보며 식사 메뉴조차 혼자 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불현듯 싫어졌다.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 혐오는 영철의 모든 부분을 불태울 만큼 큰 불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모든 부분을 혐오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도축일이 다가오기 전날, 어렸을 적 좋아했던 에버랜드에 갔다. 가면이니 부부싸움이니 하는 걱정이 없던 어렸을 시절 가족끼리 다같이 갔던, 온전한 그의 모습으로 즐기던 공간이었다. 혼자 에버랜드에 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았으나 이번만큼은 아저씨면 으레 하는 일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푸바오를 만난 건 그곳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