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철은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5시 30분이 되면 TV에 앉아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게 어린 시절의 루틴이었다. 방송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보기 잔인할 정도의 잔혹극이 빈번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사냥 후의 동물들이다. 사냥에 성공한 동물이 기쁨에 겨워 깔깔 웃는 경우는 없다. 일용할 양식에 안도감을 느끼며 드러나는 무의식 속 미소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냥감의 가죽을 뜯고 내장을 씹을 뿐이었다. 실패했을 때는 어떤가, 아쉬움에 빠져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살점을 일부 내어주고 겨우 도망친 초식동물도 그렇다. 자신의 상처를 살피긴커녕 전과 다름없이 가던 길로 향한다. 행복에 겨워 깔깔거리며 웃는 것도, 실패에 좌절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일종의 낭비인 것이다. 그저 얼른 털어내고 다른 사냥감을 물색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생존에 불필요한 감정에 지배당한다. 영철은 더더욱 그렇다. 매사에 불필요한 감정들이 밀려와 그를 방해한다. 괴롭히고, 잠 못 들게 한다. 불안의 모체가 되는 일들은 보잘것없는 일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집에 오는 길 어두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난 뒤 미처 불씨를 확인 못한 꽁초에서 불이 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그렇다. 사소한 기우들은 큰 무언가가 되어 영철을 옥죄어 온다. 그 덩어리는 영철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다. 그가 동물들처럼 단순했다면 어땠을까.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흐물흐물한 감정 따위에 무심한 사람이라면 그는 꽤 행복한 사람이었으리라. 어쩌면 인류 진화의 과도기에서 감정적인 부분이 지나치게 돌출된 돌연변이가 자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다윈의 자연선택설처럼 열등한 종자인 자신이 도축당하는 건 이미 정해진 설정값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모처럼 연차를 낸 평일 오후, 에버랜드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놀이기구에는 관심이 없기에 동물원으로 향했다. 호랑이, 원숭이를 지나며 천천히 동물을 감상하던 그는 판다 사육장을 볼 수 있는 판다월드에 다다랐다. 판다에 관심 없는 그였지만 줄이 길게 늘어선 그곳을 보고 꽤 관심이 갔다. 다 같은 동물인데도 '판다월드'라는 독점 전시관까지 주어진 판다에 괘씸함이 일었다. 얼마나 대단한 생명체기에 줄까지 서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을 띤 그에게 판다월드에 오랫동안 줄을 서기란 큰 결심을 요하는 일이다. 대기줄 사람들과의 우연한 눈 맞춤에도 얼굴이 화끈거리곤 했다. 저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판다월드에 줄을 서는 거야, 라며 압박해 오는 듯하다. 자신이 줄을 차지해 조금이라도 대기열이 길어진 것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스마트폰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관문을 벗어나기로 다짐했다. 귀는 폰을 살 때 동봉된 줄이어폰으로 들이 막으며 외부 자극을 최소화했다.
최근 즐겨 듣게 된 장혜진의 ‘키 작은 하늘’을 반복재생하다가 노래가 슬슬 질려갈 때쯤 판다월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그 노래만 반복해서 들은 뒤 질릴 것 같으면 꽤 오랜 시간 묵혀둔다. 질리는 감이 있을 때 못 참고 계속해서 들으면 그 노래와는 작별이다. 처음에는 좋았던 통통 튀는 리듬과 탄성이 나오던 후렴구도 지겨운 무언가로 바뀐다. 다음 노래로 어떤 노래를 재생할지 고민하려던 찰나 입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에 꽤 흡족하며 발을 옮겼다.
푸바오 사육장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동물 영상을 즐겨 보는 영철의 유튜브 피드에도 한자리를 늘 차지한 그녀였기에 실물로 직접 보는 건 은연 중에 영철의 버킷리스트로 남았다. 사람들이 유리창에 틈 없이 붙어있던 탓에 가까이서 푸바오를 지켜보지는 못했다. 튀어나온 배를 유리창에 붙이고 괴짜처럼 얼굴을 붉히며 푸바오를 관찰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 느껴진다. 멀리서 푸바오를 바라보는 것도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푸바오와 영철은 달랐다. 그저 대나무만 뜯어도, 나무에 올라타다 떨어져도 그는 모든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멍청한 판다의 미숙한 모습에 사람들은 매력을 느낀다. 사랑받기 위해 늘 꾸민 모습을 유지하며 긴장하는 그에겐 꽤 질투 나는 일이다. 그것은 그저 대나무를 질겅거릴 뿐이었다. 지금보다 사람이 훨씬 많아져도, 아무도 없어도 그는 늘 그 모습일 것이다. 늘 자신의 모습을 유지한다. 꽤 기품 있는 모습이다.
영철은 멍하니 남아 푸바오를 지켜본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몇몇은 귀여움에 못 참아 신음 소리를 내고, 플래시를 킨 상태로 사진을 찍다가 직원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그 일련의 흐름에도 그는 가만히 서서 푸바오를 지켜볼 뿐이었다.
꽤 시간이 지났을 무렵 배가 고파왔다. 같은 자세를 오랜 시간 유지한 탓에 몸도 쑤셔오던 참이었다. 슬슬 똑같은 광경에도 싫증이 나 판다월드를 나가기로 했다. 동물 외에 큰 관심이 없기에 근처의 식당에서 KFC에 들어가 바깥의 것보다 비싼 징거버거 세트를 다 먹고는 에버랜드를 나왔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고 생각했다. 도축일이야 늘 그랬듯 미루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