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철이 군에 입대한 후 1년여 정도가 흘렀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직전 휴가만 해도 부모님, 형과 함께 술도 마시며 좋은 추억을 쌓았기에 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영철의 가족은 늘 그랬다. 부모님이 싸우지만 않는다면 시트콤에 나오는 가족처럼 유머러스하고, 돈독한 관계였다. 그들의 싸움이 영철에겐 상처였으나 아픔을 잊을 만큼 평소의 시간은 좋았다. 하지만 불시에 싸움이 생기면 분위기는 급변한다. 5살의 영철도, 20살의 영철도 싸움을 막지 못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그의 형과는 달리 영철은 단단하지 못하다. 아버지의 화를 막지도, 어머니의 비아냥에 현명히 중재하지도 못한다. 20살 때까지의 모든 부부싸움에서 그는 울기만 하던 5살 때로 돌아갔다. 다른 부분에선 꽤 의젓해졌지만 부모님의 싸움에서 오는 고통은 늘 똑같이 아프고 두려웠다. 그들의 이혼은 걱정과는 달리 신사적으로 끝났다. 소식을 듣고 다음 휴가를 나올 때쯤에는 모든 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심 싸우기를 바랐다. 다신 안 볼 것처럼 싸우고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가족으로 돌아왔으면 했다. 그토록 싫어했던 그들의 싸움이 다시는 없을 것임에도 영철은 꽤 씁쓸하다.
가족끼리 술자리를 가질 때면 영철의 아빠는 늘 영철과 그의 형에게 사과했다. 영철의 엄마도 늘 미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사과에 대한 답은 하나만 존재한다. 부모님의 싸움에 덤덤하게 해결에 나섰던 그의 형은 늘 아무렇지 않은 듯 반응했기에, 옆에서 울기만 하던 영철이 떼를 쓰며 그 자리를 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의 싸움이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기에, 그저 가끔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일 뿐이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금전적인 걱정 없이 어른이 된 것은 부모님의 노력이 동반되는 것임을 알기에 모두 감수할 수 있는 종류의 상처였다.
소희는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였다. 군전역 후 복학한 영철에게 먼저 다가와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맞는 부분이 많았다. 최신의 노래보다는 옛날 노래를, 클래식보다 재즈를, 한국 문학보다 일본 문학을 선호했다. 영철의 것과 일치한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소희도 그랬다. 우유부단한 영철이 망설일 때면 맞든 틀리든 확고한 길을 제시했고, 자신감을 잃었을 때에는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 소희는 그의 어두운 부분을 좋아했다. 추하고 역해 다른 사람에게는 꺼내지 못한 자신의 모든 모습을 꺼냈다. 그런 부분까지도 그녀는 보듬었다. 가면을 통하지 않고 보는 소희는 어떤 존재보다 아름다웠다. 그들의 사랑은 현대의 칙칙한 사랑과 달랐다. 누가 더 좋아하는지 저울질하며 관계의 주도권이 생기고 산술적인 공식이 있는 건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너무도 커 저울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코끼리를 인간이 쓰는 체중계에 올려놓으려는 것과 같았다.
소희와 헤어진 건 그녀의 바람 때문이었다. 남자와 모텔에 들어가는 걸 직접 목격했다. 다음 만남에서 영철이 목격한 광경을 들은 소희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변명 섞인 해명이 체 끝나기 전에 도망쳤다. 카페를 나와 뛰고 또 뛰었다. 소희는 밉지 않았다. 모텔에 들어갈 때 막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남자의 큰 체격을 보고 움찔했던 영철이 미웠다. 사랑하는 여자를 단지 맞을까 봐 지키지 못했다. 작은 아픔에도 놓아버릴 정도로 소희를 좋아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조금의 손해가 예상되면 아무리 소중한 이라도 포기하는 구제불능인 걸까. 후자였다. 바람의 책임도 영철에게 있었다. 그의 본모습에 소희는 점점 호감을 잃어갔으리라. 그때부터 가면은 다시는 벗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별 이후 자살을 결심했다. 소희를 겪은 영철에게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진실이라 여긴 사랑마저 연극에 불과했다. 그녀 역시 기괴한 영철의 본모습을 감당하기 위해 사랑에 빠진 얼굴을 띤 가면을 썼을 뿐이다. 그는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철의 가면극에서 배우는 그저 대본에 적힌 극의 흐름에만 따라가면 된다. 즉흥적인 애드리브는 허용되지 않는다. 소심한 찌질이의 대명사인 '영철'이라는 배역은 대본의 흐름대로 패배하고 상실하다 후회에 찬 죽음을 맞으면 그뿐이다. 대본대로만 흘러가는 이 극을 그만두고 싶었다. 매번 두려움에 졌던 그였기에 이번만은 흐름에 벗어나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내심 그에게 사소한 아픔을 줬던 이들에게 극단적인 행위로 되갚아주고 싶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탓해 봐야 어리광에 지나지 않는다. 유서에서는 다르다. 그들의 사소한 무례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자신이 겪은 아픔보다 거대한 죄책감을 주고 싶었다.
매년, 매달, 매주 영철은 자신의 도축일을 계획한다. 연탄불을 피우는 것도,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는 것도, 손목에 칼을 긋는 것도 늘 머릿속에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주변인들의 작은 호의는 영철을 좌절시킨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한 가면에서 벗어나 무한한 행복을 맞이한다. 찰나의 희열에 취하고 나면 자괴감이 몰려온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살을 생각하던 사람이 찰나의 호의에 다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 늘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지만 터무니없는 이유로 다시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얻는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