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에 나오는 푸바오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을 꿰고 있는 듯 해설하는 내레이션은 기괴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생활양식에 따라 대상의 의도를 꾸며내는 것뿐이다. 기가 죽었는지, 기쁜지, 심심한지, 직접 들은 일도 아니면서 입맛대로 해석한다. 그들의 강압적인 해석에 푸바오도 꽤 고통스러우리라고 생각한다. 이마저도 영철의 자의적인 내레이션이지만 그의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푸바오와의 첫 번째 만남 이후 영철의 삶이 잘풀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할 일만 묵묵히 마친 뒤 맥주가 떨어진 날에는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가고 주말이면근처 도서관에서 2주 간 읽을 책을 빌려 온다. 책을 사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좋다.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들이 너무도 많기에 도서관에서 빌려 빠르게 보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게 편하다. 나름 삶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나날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일 년 중 며칠 안 되는 도축일을 생각하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잔소리꾼 이 부장은 웬일인지 영철에게 싫은 소리가 없었으며 중요한 업무도 다 끝나 일의 강도도 꽤 편해졌다. 미신에 늘 빠져 있는 영철은 푸바오와의 만남이 좋은 효과를 몰고 온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 좋은 나날이 끊기기 전에 '푸바오 효과'를 재충전하기로 결심했다. 푸바오와의 재회는 첫 만남으로부터 2주 뒤 토요일로 정해졌다. 연차를 한번 더 쓰기는 싫었다. 매사에 관심이 많은 이 부장이 웬일로 연차를 쓰냐며 영철의 일상을 파내려고 할 것이다. 지난번 연차 때도 무얼 하러 가냐며 계속해서 귀찮게 굴었다. 오지랖 넓은 꼰대의 정석이다. 영철이 싫어하는 류의 인간상과 일치한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아 자신의 불행을 타인에게 옮겨 놓는다. 맘껏 화를 분출한 이 부장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 시시콜콜한 농담을 날린다. 내게 비수를 날린 상대의 농담에 웃어주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 내에서 '예스맨'인영철에게는 더 심했다.
이 부장은 영철을 좋아한다. 그에게 심하게 화를 낸 날은 좋아하는 냉동 삼겹살 집에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의 이 부장은 다른 사람이 된다. 영철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자신의 성격을 자책한다.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이때의 이 부장은 잠깐이라도 눈을 두기 싫은 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부부싸움 후 부모님이 사과를 건네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들의 사과에 가식은 없다. 공감 말고는 다른 감정이 끼어들 수 없는 뜨겁고 질퍽한 사과는 영철을 너그럽게 만든다. 분노와 우울에 휩싸였던 영철은 어느새 이 부장에 공감한다. 집에서는 부인과 아이들에 외면당하고 회사에서는 실적에 대한 압박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화풀이할 대상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일 것이다. 소주잔이 부딪히고 다시 술이 채워지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 영철은 이 부장이 된다. 남자들 간의 뜨거운 우정을 다지는 회동이 끝난다.
다음 날이 되면 함께 나눴던 술잔과 추억은 아득해진다. 이 부장의 총구는 영철을 향한다. 어젯밤의 정많던 그가 아니다. 방아쇠를 지체 없이 당긴다. 영철의 옆구리 살은 흔적 없이 흩어지고 고통에 빠져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고통에 휩싸여 고개를 숙일뿐이다. 이 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복종의 자세'이다. 이 부장이 죽도록 밉다. 그의 사과가 다음의 격발을 위한 장전 정도로 악용되고 있음도 잘 안다. 그러나 영철은 눈물을 동반한 사과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번은 다르겠지..' 하는 영철의 미련한 온정은 그 자신에게는 늘 가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