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재즈의 전성기와 블루노트의 침체기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재즈 사운드가
전기기타와 전기기타 연주자들인 그랜트 그린, 케니 버렐, 웨스 몽고메리의 연주였다면
다른 한편에서 또 다른 결의 재즈 사운드는
하몬드 올겐을 전면으로 내세운 소울/펑크 재즈의 명인인
지미 스미스, 닥터 로니 스미스, 래리 영의 연주가 아닐까 생각한다.
1935년, 로렌스 하몬드(Laurens Hammond)는
최초의 하몬드 올겐인 Model A를 선보였다.
이는 파이프 오르간을 대체할 수 있게
저렴하면서도 휴대/이동이 가능한 악기로 설계되었다.
이는 곧, 작은 교회와 극장 및 클럽 등지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1950년대 들어 흑인 교회를 중심으로 급격히 사용이 늘었고,
1954년에 개발된 B-3 모델은
재즈, 블루스, 소울, 가스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된다.
드로우바를 통한 다양한 음색과
발 페달로 연주하는 베이스 라인,
그리고 레슬리 스피커 안에 장치된
고음을 위한 내부 혼과 저음을 위한 로터가 회전하면서
소리의 음량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진폭변조로 인한 회전음향은
하몬드만의 독특한 음색과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전자악기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하면서도 끈적한 음색은
전자악기와 어쿠스틱 악기 사이의 오묘한 매력을 가진 악기였다.
블루노트 레코드는 전기기타와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악기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하몬드 오르간은 당시 유행하던 하드밥, 비밥의 언어에
블루스와 가스펠의 뉘앙스를 결합하며
소울 재즈(Soul Jazz)라는 새로운 사운드의 한 페이지를 열었다.
드럼, 기타, 색소폰과 함께 오르간 트리오 또는 콰르텟 편성은
클럽과 대중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는 블루노트의 음반 판매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새로운 재즈 사운드의 혁신을 이룬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단연 지미 스미스(Jimmy Smith)가 있다.
그는 1956년 블루노트와 계약한 뒤, < The Sermon! >,
< Back at the Chicken Shack > 같은 앨범으로
하몬드 오르간을 재즈의 중심 무대로 끌어올렸다.
그의 연주는 비밥적 기교와 블루스적 감성을 결합해
하몬드 오르간을 곡의 배경에 깔리는 반주 악기에서
곡의 전면에 나서 활개 치는 솔로 악기로 자리매김한다.
그의 성공은 뒤를 잊는 후배 연주자들에게 이어졌다.
Dr. Lonnie Smith는
Jimmy Smith와 더불어
블루노트 레코드의 핵심 오르간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색소폰 연주자 루 도널드슨의 앨범 < Alligator Boogaloo >의 사이드맨으로 참여하며
블루노트와 첫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 Think! >(1968)를 시작으로
자신의 앨범을 본격적으로 블루노트에서 발매하기 시작한다.
1969년 블루노트에서 발매된 Dr. Lonnie Smith의 앨범 < Turning Point >에 수록된
[ Seesaw ]는 이 앨범의 첫 번째 트랙으로,
바로 전 해에 아레사 프랭클린이 히트시켰던 동명의 히트곡을 연주곡으로 커버했다.
[ Seesaw ]는 강렬한 펑크와 소울 재즈의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Dr. Lonnie Smith의 연주 스타일을 대표하는 연주 중 하나이다.
Dr. Lonnie Smith는 소울 재즈에
펑크, 록, 심지어 사이키델릭 한 요소들을 접목시킨 선구자이다.
그는 잔통적인 기존 재즈 오르간 연주를 답습하는 대신,
자신만의 독특한 그루브와 즉흥 연주로 기존 장르가 가진 사운드의 경계를 허물었다.
[ Seesaw ]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연주는 역동적이고 모험적이며,
하몬드 올겐의 연주가 어떻게 곡의 전면으로 튀어나와
듣는 이들을 어떻게 열광시키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후에, 조이 드프란체스코, 존 메데스키(Medeski, Martin & Wood), 코리 헨리 등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재즈뿐만 아니라 펑크, 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지대한 음악적 영향을 미친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Dr. ( 박사, 의사 )라는 닉네임은
이러한 그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명성을 상징하는 별명이다.
그의 많은 솔로 앨범들은
지미 스미스가 확립한 소울 재즈 오르간의 계보를 이어가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더해 소울 재즈의 클래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이후에도 여러 레이블에서 활동했으며,
2016년에 < Evolution > 앨범을 통해
46년 만에 다시 블루노트로 돌아와
소울재즈의 전설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970년대는
반도체 기술의 발전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전자제품들만큼이나
음악에서도 신시사이저등의 전자악기가
서서히 다양한 음악들에 활용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신시사이저와 일렉트릭 피아노는 록과 퓨전 재즈의 사운드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전부터 연주되어 온 하몬드 오르간은
재즈·블루스·가스펠을 가로지르며 전통적인 영혼의 울림을 지켜내는
전자악기로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 차별화되었다.
교회의 소울 풀한 화음과
작은 클럽의 펑키한 리듬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
여기에 재즈 특유의 즉흥성이 결합하면서,
세련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타협하지 않는 블루노트만의 독특한 재즈의 세계를 지켜낸다.
하지만 하몬드 오르간이 재즈의 한 축을 새롭게 열어젖히던 바로 그 시기,
블루노트 레코드는 가장 깊은 침체기로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1967년 알프레드 라이온의 은퇴,
1971년 프랜시스 울프의 사망으로 레이블의 정체성을 지탱하던 인물들이 사라졌다.
잦은 인수·합병 속에서 경영권은 음악적 실험보다는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경영진에게 넘어갔고,
블루노트를 지탱해 온 예술적 철학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대의 음악적 풍경도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록·펑크·디스코가 젊은 층을 휩쓸면서 재즈의 시장사은 크게 위축됐다.
블루노트가 주력하던 하드 밥과 소울 재즈는 구식으로 치부되었고,
퓨전이나 재즈-펑크의 새로운 시도들도
상업적 성과 측면에서도, 예술적 평가에서도
대중들에게 기대만큼의 충분한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여지없이 음반 판매는 급감했고,
허비 행콕·웨인 쇼터·맥코이 타이너 같은 블루노트를 대표하던 간판 뮤지션들마저 다른 레이블로 떠났다.
결국 블루노트는 과거 발매되었던 카탈로그 재발매에 의존하며 명맥을 이어갔고,
급기야, 1979년 EMI에 인수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85년 브루스 런드발의 부임 이후에야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제2의 블루노트 전성기가
뚜벅뚜벅 걸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