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안에 살아 숨 쉬는 지속 가능한 예술 브랜드.
Once Upon A Time...
대학원 시절,
예술경영학 첫 수업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학생 대부분은 주저 없이 “이윤의 극대화”라고 답했다.
그러나 교수님은 곧바로 되물으셨다.
“그 이윤 추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그때 교수님이 강조하신 핵심은 의외로 단순했다.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
즉 모든 경영 활동의 최종 목표는
‘계속 기업(going concern)’,
다시 말해
망하지 않는 것이다.
브루스 런드발(Bruce Lundvall) 체제의 블루노트는,
한때 전통 재즈의 상징이었던 레이블이
어떻게 대중성과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그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은
바로 노라 존스(Norah Jones)의 데뷔 앨범 < Come Away With Me >(2002)였다.
이 앨범은 블루노트의 80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이전 최고 기록이었던
도널드 버드의 < Black Byrd >(1973)을 압도적으로 넘어섰다.
1985년,
브루스 런드발은 침체되어 있던 블루노트를 재건하며
“음악이 앞서고, 상업은 따라오게 하라
(Let the music lead and the commerce follow)”는 철학을 내세웠다.
이는 단순히 재즈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실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 철학은 17년 뒤 노라 존스의 등장으로 현실이 된다.
노라 존스의 발굴 과정은 우연과 직감의 산물이었다.
EMI 계열사 회계 부서의 한 직원이 뉴욕의 작은 클럽에서
그녀의 공연을 보고 감명받아 브루스 런드발에게 데모를 전달했다.
직접 그녀의 연주를 들은 브루스 런드발은,
그 음악이 기존 재즈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건 재즈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블루노트의 음악이다.”
라고 말하며 계약을 결정했다.
노라 존스의 음악은 장르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으로
블루노트가 나아갈 새로운 레이블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재즈의 즉흥성과 블루스의 여운, 포크의 단순함,
그리고 컨트리의 따뜻함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브루스 런드발은 이 음악을 억지로 ‘재즈화’ 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나른하고 따뜻한 음색, 담백한 피아노 톤을 중심으로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그녀가 만들어 낸
'친밀한 공간 속의 소리’라는 질감을 살렸다.
이 앨범의 성공에는 시대적 배경도 크게 작용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은
극도의 피로감과 불안 속에서 따뜻한 위로를 원했다.
노라 존스의 담담한 목소리와 잔잔한 음악은
그 차갑게 식은 불안한 공기를 따뜻하게 덥혀주는 듯한 위안을 주었다.
화려한 비트나 자극적으로 꾸며진 가식적인 사운드 대신,
일상의 온기를 전하는 단순한 멜로디가 대중에게 진심을 전했다.
발매 초기엔 주목받지 못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팔리기 시작한다.
결국 1년 뒤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고,
전 세계에서 3,000만 장 이상 판매된다.
200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주요 4개 부문을 포함한 8관왕을 차지하며,
블루노트는 다시 ‘살아 있는 미국의 재즈 브랜드’ 임을 확인한다.
브루스 런드발에게 < Come Away With Me >는 단순한 히트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경영철학과 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기반으로 한 확장과 혁신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인 현실적 성과로 증명한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재즈를 하나의 고정된 형식으로 보지 않았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그 본질인 ‘진정성’을 놓치지 않았다.
노라 존스의 성공은
블루노트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브랜드임을 증명했다.
동시에, 브루스 런드발이 평생 믿어온 그 한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좋은 음악은 언젠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닿는다.”
노라 존스의 대성공 이후,
블루노트 레코드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 재즈의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
브루스 런드발이 세운
“음악이 앞서고, 상업은 따라오게 하라”는 철학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것을 오늘의 감각으로 구현할 새로운 목소리가 필요했다.
2010년까지 블루노트를 이끌던 브루스 런드발에게 노라 존스가 있었다면
2011년부터 새롭게 블루노트의 수장자리를 맡아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돈 와스에게는
그레고리 포터(Gregory Porter)가 있다.
그레고리 포터의 음악은 재즈, 소울, 블루스, 가스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블루노트가 추구해 온 ‘재즈의 대중화’라는 노선을 완벽하게 이어갔다.
그의 데뷔 앨범 < Liquid Spirit >(2013)은
블루노트가 21세기에 들어 가장 확실히 대중에게 다가선 재즈 음반 중 하나이다.
전통적인 재즈 보컬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리듬과 멜로디에는 소울의 따뜻함과 복음성가의 힘이 스며 있었다.
타이틀곡 [ Liquid Spirit ]은 흥겨운 리듬과 코러스가 어우러져,
재즈를 낯설게 느끼던 사람들에게도 쉽게 다가갔고,
그리고 [ Hey Laura ]는 그의 바리톤 보컬이 가진
사람냄새 짙게 베인 진한 감동을 전한다.
그는 원래 인디 레이블 모테마(Motéma)에서 활동하며
이미 < Water(2010), Be Good >(2012) 같은 앨범으로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도약은
돈 와스(Don Was)가 이끄는 블루노트로 옮긴 뒤 현실이 된다.
돈 와스는
“그레고리 포터는 재즈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그 울타리를 스스로 넓히는 가수”라고 그를 평가한다.
브루스 런드발이 노라 존스에게서 보았던 가능성을,
돈 와스는 그레고리 포터에게서 다시 본 셈이었다.
그레고리 포터는 자신의 음악을 “재즈 위에 놓인 인간의 이야기”라 정의한다.
그는 재즈의 기법을 빌리되,
그 안에 블루스의 체념, 소울의 감정, 그리고 가스펠의 신념을 담았다.
그의 노래에는 종교적 열정과 일상의 따뜻함이 공존한다.
덕분에 재즈 팬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Liquid Spirit은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으며
그래미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상을 수상했다(2014).
이후 발표한 < Take Me to the Alley >(2016)로 같은 부문을 다시 수상하며,
그는 단숨에 현대 재즈 보컬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이런 연속적인 성취는 블루노트에게도 큰 의미였다.
노라 존스가 블루노트의 상업적 생명력을 되살린 인물이라면,
그레고리 포터는 21세기 재즈 보컬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의 음악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폭넓게 사랑받았다.
특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백만 장 이상 판매되며,
재즈 앨범으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의 목소리는 기술보다 인간의 체온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국, 노라 존스가 보여준 ‘재즈의 경계를 넘어선 블루노트의 진정성’은
그레고리 포터에게로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재즈를 형식이 아닌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언어로 받아들였고,
블루노트는 재즈라는 언어를 통해 다시 한번 현시대의 청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선다.
그렇게 블루노트는 과거의 유산을 반복하는 레이블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목소리를 품은 이름으로
대중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래전 내 기억 속의 경영학 수업은
단순히 경영만을 위한 수업은 아니었다.
인간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가?
그 근본적인 물음이 그 안에 있었다.
음악가,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무엇일까?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의 완성?
그로 인해 얻는 부와 명성?
혹은 그 모든 외적 조건을 넘어선,
자기만족과 자아의 성취일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생각해 본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의 궁극의 목표는
‘계속 예술을 할 수 있는 것’,
즉 예술의 Going Concern이 아닐까?
현실적인 성공이나 눈에 보이는 명예보다,
오늘도 창작을 이어갈 수 있는 바로 그 상태.
그 지속의 가능성이야말로
예술가에게 가장 본질적인 생명력일 것이다.
블루노트가 그랬다.
한때 예술성과 이상을 상징하던 그 레이블은
노라 존스와 그레고리 포터의 상업적 성공을 발판으로
새롭게 부활한다.
그들의 음악이 불러온 대중적 호응은
단순한 상업적 성공의 문제가 아니다.
블루노트가 다시금 ‘존속할 수 있는 예술’을 회복하게 한 희망의 불씨였다.
결국 그 불씨는,
블루노트의 예술이 계속될 수 있도록 지켜낸
가장 현실적이고도 고귀한 형태의 지속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