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Sia

찾아가도 되나요?

특강을 막 끝냈을 때였다. 시선을 바닥에 둔 채 라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는 입꼬리를 잠시 올렸는데 미소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라가 온 것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약속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했다고 문자로 알려왔을 때 적이 당황했다. 문 앞을 서성거렸을 라를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라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심리치료를 경험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글이 잘 나오는 편이라고 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작년에 비하면. ‘작년’이라는 말이 계속 등장했다. 불안도 작년에 비하면 좀 괜찮고, 머리 아픈 것도 그렇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작년에 비해서 나아졌다고 했다. ‘작년’에 어떤 일이라도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라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몸이 좋지 않아 한해 휴학했을 뿐,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나는 ‘작년’에 좀 아팠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나았다. 코로나였던지도 모른다. 자가 키트로 검사하지도 않았다. 내가 조금씩 나아가는 동안 어머니는 앓기 시작했다. 보름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결국 나았다. 그 모든 게 기적 같았다. 그게 ‘작년’이었다.


라는 어머니와 세 살 위인 언니와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아주 오래전 일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몇 년 정도 되었는지 물어보았지만, 라는 아주 오래전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는데, 벌이가 변변치 않다고 했다. 라는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오래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요. 주인이 그만두라고 했어요. 라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이런 이야기만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라는 제대로 털어놓지 않는 듯했다. 마음에서 맴도는 뭔가를 끄집어내지 않았다. 대화는 자꾸만 겉돌고 있었다. 일상 이야기들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다였다.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대놓고 물어보았다. 라가 말했다. 살고 싶어서요.


라는 자꾸만 죽고 싶어서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정신과 약을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어요. 죽고 싶은 생각이 멈춰지지 않아요.

화장기 없는 라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유난히 짙은 눈썹과 쌍꺼풀이 진 눈, 약간 좁은 이마에 풍성한 긴 머리칼이 어깨를 덮고 있었다. 검은색 티와 청바지 차림의 라는 네이비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언제부터 약을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작년이라고 했다.


-그때, 입원했었어요. 삼 개월 정도요. 퇴원해서는 외래를 다녔는데, 지금은 약을 먹지 않아요.

어떤 이유로 약을 먹지 않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라가 말했다.


-엄마가 그만 끊으라고 했어요. 약값 낼 돈이 없다고요. 약 안 먹은 지는 삼 개월 정도 되었어요.

죽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라가 말했다.


-그냥요. 딱히 이유는 없어요.

심리치료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라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서 의사와 처음에 몇 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게 심리치료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정신과적 병명을 알고 있는지 묻자, 라는 우울증이라고 답했다. 죽고 싶은데 살고 싶은 라. 라는 국가장학금 신청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소득분위 1순위라는 거였다. 라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분명했다. 자살을 멈추고 싶으니 치료를 받고 싶다는 것. 이 사실을 눈치채고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치료비를 낼 수 없는 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마음을 낸다면 간단했다. 치료비를 포기하면 된다.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하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하거나 내담자는 공짜라는 생각에 치료를 소홀히 할 수 있다. 내담자의 마음도 그럴 수 있다. 정당한 비용을 내지 않으니 치료 과정을 허술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치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라는 분명 살고 싶어서 온 것이다!


두 시간이나 훌쩍 넘겼지만,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라한테 돈을 받지 않을 테니, 12회기의 심상 시치료를 하겠냐고 했다. 라는 갑자기 얼음이 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라가 물었고, 내가 부드럽게 답했다. 모레, 이번 주 토요일부터요. 내친김에 시간도 정했다. 오후 두 시. 학기 중이라서 평일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비로소 라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라고 해도 좋을 만했다. 라한테 두 가지만 약속해 달라고 했다. 첫째, 자살 생각은 프로그램하는 동안만큼은 내려놓고, 아예 시도하지 않기. 둘째, 때때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주어진 대로 끝까지 하기.

라는 약속하겠다고 했다. 혹시 자살 생각이 너무 많이 날 때면 지체 말고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라는 그러겠다고 했다. 가벼운 빈 마음으로 오면 된다고 덧붙였다. 막 문을 열고 나가면서 라가 돌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글로 어떻게 치료를 한다는 거죠? 이제부터 알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