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기억을 먹다 --- 2

bySia

BC 290년경 만들어진 중국의 전국 시대 사상가인 장주가 지은 책인 장자의 외편 20, 산목 편에 나오는 ‘빈 배’를 라한테 보여주었다.




빈 배

장자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라가 직접 낭독하게 했다. 유키 구라모토의 ‘명상’을 배경음악으로 들려주었다. 이상하기 그지없는 글이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맞은편에 내가 탄 배 쪽으로 다른 배가 다가오고 있다. 그 배 안에 누군가가 있다면, 당장 소리를 지를 것이다. 이것 봐요! 방향을 틀어! 이러다가 부딪히겠어욧! 고함을 지르며 따질 것이다. 한참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보니,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맞은편 배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제야 입을 다물고 해야 할 일에 몰두하게 된다. 조심스럽게 내가 탄 배의 방향을 돌려서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궁리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해야 한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상대방의 배를 빈 배로 여길 수 있다면 상대방과 맞서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웬걸, 장자의 생각은 달랐다.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내가 탄 배를 빈 배로 만들라고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와 맞서면서 상처 입히려 들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장자의 ‘빈 배’를 그동안 많은 이들한테 보여주었다.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면, 대개 이렇게 답한다. 장자는 도가의 대표적 인물이니,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 분명하다고. 마음은 어떻게 비우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된다. 욕심은 어떻게 내려놓냐고 하면, 그걸 못하니까 이 고생이라고 답한다. 또는 장자 정도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데 나는 장자가 아니니 엄두가 안 난다고도 한다. 장자는 도가사상을 뽐내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위대한 가르침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시의 느낌을 물었다. 라가 알쏭달쏭하다고 했다. 뭔가 엄청난 교훈을 담고 있는 것 같은데, 언뜻 깨닫지 못한 자신이 답답하다고 했다. 인상 깊은 구절이나 단어를 말해보자고 했다. 라는 ‘화’라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자신의 마음이 화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묻자 라가 답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태어났을 때,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요. 엄마도 화가 많았어요. 늘 화를 내고 있는데 지금까지도요. 화도 유전되나요?


맞다. 화는 유전도 되고 전염도 된다. 화는 불이다. 불이 나면, 불붙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당장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부터 옮겨붙는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언제나 화가 나 있는데 특히 집안일을 할 때 심했다. 청소나 빨래할 때면 유독 화가 솟구쳐 올랐다. 청소할 때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대번에 욕이 튀어나오고 빗자루로 때리기 일쑤였다. 화는 종종 울음과 체념으로 곪아 터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재가 되어 사방으로 뿌려지기도 했다. 내 가슴에는 다 타 버린 재밖에 없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말을 듣고 또 들으며 자라왔다. 고작 여섯 살 아이가 어쨌길래 어머니 마음에 재를 남기게 했던 걸까?


어머니의 화는 곧 내 화가 되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화가 많았던가. 모든 것이 화였다. 잘 되지 못한 모든 일은 화가 되었다. 잘 되어도 그게 믿기지 않아 불안해서 화가 났다. 잘해야 하는데 잘하지 못한 것도 화가 되고, 잘할 수 없는 것도 화였다. 놀라운 것은 재가 되어도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가 되었다가 다시 활활 타오르는 놀라운 가소성을 지닌 화! 이내 화는 다시 자라나는 도마뱀의 꼬리가 되어 활개를 쳤다. 사실, 화풀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화는 절대 풀어지지 않고 더욱 불붙는다. 화를 끄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이미 붙어서 타오르고 있다면 ‘물’을 꺼낼 수가 없다. 오히려 화를 더 부추기게 된다. 화가 나면 제대로 현실을 보지 못한다. 현명한 판단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이렇게 외칠뿐이다. 화염에 휩싸인 채 타오르는 이 마당에 물이라니! 닥쳐!


‘자신을 빈 배로 만든다’는 뜻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했다. 라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배에 타고 강으로 간 거잖아요. 배에 있는데 없는 척하라고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라의 진솔한 답이었다. 어쭙잖게 욕심을 비운다거나 중용을 지킨다거나 하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 라. 배에 있는 것을 자신을 빈 배로 만들라는 가당치도 않은 것을 말한 장자. 도대체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좋긴 하겠어요. 그렇게만 하면 다툼이나 갈등, 싸움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죠? 선생님은 아시나요?


이 마지막 구절을 두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장자가 실성이라고 했단 말인가? 나 자신을 빈 배로 만들라니? 분명 배에 타고 있는데 어떻게 빈 배로 만든다는 말인가? 합리적으로 사고하자면, 이럴 수는 있다. 상대방의 배를 빈 배로 여기는 것이다. 상대방을 허수아비로 보면, 다투지 않고 슬쩍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쳐 읽어도 장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물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비물질로 접근해야 한다. 인간을 이루는 비물질의 대명사는 마음이다. 마음을 지금, 여기, 이 순간 하늘로 이동하면 어떨까? ‘하늘’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기 전에 살다가 죽고 난 뒤에 가는 곳. 근원의 고향. 신앙 속 신이 존재하는 곳.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자면, 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곳. 뚜렷한 한계 속에 갇힌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은 ‘상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마음을 하늘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 다툼과 미움과 원망과 원한은 하찮은 것이 된다.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들은 급기야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 정도로 작아진다. 그럴 때 육체만 남은 상태는 빈 배가 되는 셈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마음을 하늘에 보낼 수 있을까? 아주 쉽다. 하늘을 상상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나는 지금 신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어.”, “나는 지금 근원의 고향에 있어.”, “나는 죽음 이후의 세상에 가 있어.”라고. 굳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하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상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하다 보면 누구나 쉽게 하늘로 갈 수 있다.


라한테 눈을 감은 채 복식호흡을 해보자고 했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어보자고 했다. 양손을 갖다 대고 배의 움직임을 느껴보자고 했다. 일상생활을 할 때 뇌파인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떠올려보자고 했다.


“나는 지금 배를 타고 가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바다를 항해하는 중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폭풍우와 거센 파도를 만났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부딪혀오려는 상대방의 배를 보고 화가 나서 싸운 적도 많았다. 차마 싸우지 않고 피할 때조차 화를 삭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제 나를 하늘로 보내려고 한다. 더없이 푸르고 맑은 하늘에 내 마음을 보내려고 한다. 하늘에 내 마음을 고스란히 두려고 한다. 지금, 현재, 이 순간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 쏟아지는 맑디맑은 하늘에 지금 와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하늘의 기운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충분히 느끼고 나서 눈을 뜨게 했다. 느낌을 한 단어로 요약해서 말해보자고 했다. ‘평화’라고 라가 답했다. 마음이 하늘과 합해졌다고 했다. 맑고 평안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지더라고 했다. 라의 표정도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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