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깊은 구절, 단어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했다. 라는 ‘손님’이라고 했다.
-우울이 손님이라니! ‘님’자를 붙일 수 있다니, 너무나 놀라워요. 나는 우울 보고 욕을 퍼부어댔거든요. 개새끼라고요! 이제부터 우울을 존중해야겠습니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니까요.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존중할 수 있을까요?
지금, 그걸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라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맑은 실로폰 소리 같았다.
-아, 그렇군요!
종이 위에 내 안의 ‘슬픔, 좌절, 낙담’하면 생각나는 것을 적어보자고 했다. 라는 ‘우울, 짜증. 화’라고 적었다. 이번에는 불러주는 대로 적어보라고 했다. 내가 불러준 글귀는 이렇다.
“나는 내 안에 찾아온______________________을 웃으면서 손님으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빈칸에는 방금 적은 세 가지를 적어보자고 했다. 그리고 중간은 자연스럽게 라가 적어보자고 했다. 제일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해 보자고 하며 불러주었다. 역시 빈칸에는 앞에 적은 세 가지를 그대로 적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내 안에 찾아온 _____________________한테 감사합니다.”
라는 펜을 쥔 채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쓱쓱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쓴 다음 읽어보자고 했다. 라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나는 내 안에 찾아온 우울, 짜증, 화를 웃으면서 손님으로 맞이합니다. 그동안 나는 이들을 욕하면서 동시에 나를 욕했습니다. 나와 이들을 분리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럴수록 부정감정에 사로잡혀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늪으로 빠지는 듯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내 손님인 것을 알겠습니다. 잘 머물다가 가라고 웃으면서 맞이하겠습니다. 나를 공격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떠날 때가 되면,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겠습니다. 아직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이해가 아닌 믿음으로 이들이 내 내면의 성장을 위해 신이 보낸 손님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찾아온 우울, 짜증, 화한테 감사합니다.”
놀라웠다. 이토록 속속들이 시의 향기가 배어들게 적다니, 그저 박수만 보낼 뿐이었다. 글을 쓴 느낌을 물어보았다.
-글쎄요. 이제껏 생각해보지도 않은 말이 나왔어요. 놀라워요. 뭔가 꽉 막혀있는 돌덩이가 옆으로 치워진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이 상황이 되면, 이렇게 쓴 대로 잘 해낼지는 자신이 없어요.
라도 스스로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새가 갑자기 날 수는 없지만, 지금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울이 찾아오면 웃으면 되나요? 화가 나는데, 짜증이 나는데도요? 웃음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라는 심각한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이제 감정과 자신을 분리했으니 실질적인 이야기를 할 순서였다. 우울, 화, 짜증, 낙담, 후회, 실의 등등... 살면서 만나는 온갖 부정감정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잠식하려 드는가. 그럴 때 웃는다니 무슨 소리인가? 화가 날 때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우울할 때도 그렇다. 시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저 내가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며 순간순간 드는 감정을 이렇게 알아차리면 된다. 내가 지금 우울하구나.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내가 짜증이 많이 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해도 부정은 걸음을 멈춘다. 여인숙에 찾아온 손님은 모골이 송연해진다. 어서 빠져나가고 싶어서 안달 날 것이다. 괜히 찾아왔구나 싶어서 빨리 가게 될 것이다. 알아차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손님이 찾아오는 횟수가 드물어진다. 머무는 시간도 짧아진다. 애면글면하면 오히려 손님들은 찰싹 달라붙게 된다. 모든 것을 섭리와 이치에 맡긴 채 놓으면 스르르 풀려나간다. 사실 ‘내맡김’은 그다음 단계의 이야기다. 일단, 알아차리는 것부터 해보면 된다.
라가 싱긋 웃었다. 웃으니까 얼굴이 환해 보였다. 그 말을 했더니 라가 한 번 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거군요. 이제 알겠어요!
라한테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해보자고 했다. 온몸을 이완한 뒤에 우울, 화, 짜증을 웃으면서 손님으로 맞이하고 있는 나를 떠올려보자고 했다. 나를 찾아온 우울, 화, 짜증한테 감사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리는 순간 내 마음은 푸른 하늘과 우주와 합쳐져서 중심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그렇게 우주의 기운과 합쳐져서 매 순간 바뀌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며 내 중심이 내게 에너지를 보내줄 수 있다. 나는 내 안의 중심에 나를 다스릴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늘과 우주의 기운과 합쳐진 마음을 고스란히 느껴보면서 눈을 떠보자고 했다.
-마음이 뻐근해졌어요.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에요. 뭔가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해요. 충만한 느낌이 들어요.
라가 말했다. 이번 두 번째 만남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마음이 건강해지는 비결을 배운 느낌이에요. 실제로 생활 속에서 해보겠습니다. 잘 되든지 어떤지 다음 주에 와서 말씀드릴게요. 참, 힘이 되는 메시지, 꼭 해올게요.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특한 라! 말하지 않아도 앞질러서 다짐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다음 회기까지 과제는 두 가지다. 힘이 되는 메시지, ‘잘 살고 있어!’를 하루 세 번 해오기. 아침 눈뜨자마자, 밤에 자기 직전, 낮 동안 원하는 시간에. 그리고 ‘땅’을 바라보고 오라고 했다. 바닥이 아니라 땅이라고 강조했다. 예전에 이런 과제를 냈을 때 어떤 내담자는 카페에 앉아서 시멘트 바닥을 보고 온 적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 살아있는 땅을 보고 오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한 삼 분 정도 이 세상에 땅과 나만 존재한다는 듯이 집중해서 땅과 만나면 좋겠다고 했다. 몸과 마음을 이완하면서 보라고 했다. 땅의 에너지를 충분히 받고 오면 된다고 했다. 저번 시간에 한 것이 하늘의 에너지라면, 이제는 땅의 에너지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라는 잘 해오겠다고 거듭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