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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Mar 19. 2023

뉴욕은 기꺼이 낮에 마신다

I can’t recognize Mom & Dad

(미국 일기 #11)


계산을 해 보니 한 시간 좀 넘게 여유가 있었다. 약속 장소는 센트럴파크 근처다. 뉴욕 기차역인 펜 스테이션에서 걸어서 30분. 미술관 같은 곳에 들르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내가 언제 가고 싶은 곳이 있었나. 좀 걷지 뭐. 센트럴파크를 산책해도 되고. 


대낮이었지만 거리는 어둑어둑했다. 비가 살짝 뿌리는 쌀쌀한 날씨였다. 거리에는 나 말고 우산을 쓴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국에서는 비가 많이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 


금요일 뉴욕 맨해튼은 인파로 넘실거렸다. 자동차들은 교통정체로 움직이지 못했다. 뉴욕의 보행자들은 아무도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다. 거대한 몸집의 흑인 경찰이 사거리 한복판에 서서 혼돈의 거리를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다. 


우산을 써도 옷이 축축하다. 어디서 커피나 한잔 할까. 뭐라고? 걸음을 멈췄다. 내가 언제부터 시간이 남으면 커피를 마셨지?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업무 시간인가? 물론 시간이야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 업무라는 것이 있나. 그럴 리가. 백수 된 지가 언제인데. 운전을 해야 하나? 차도 없잖아. 그래. 당연히 술을 마셔야지. 낮술을 한잔 해야지. 미국에 왔다고 나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박찬일 셰프가 쓴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침부터 작은 노포에서 따뜻한 쇼추를 한 고푸 털어 넣고 출근하는 오사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한잔, 자리를 옮겨 저기서 한잔. 그렇게 천천히 취해가는 오사카 여행을 하고 싶었다. 혼자도 좋고, 둘은 더욱 좋겠다. 셋도 나쁘지 않다. 


낮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낮술에 취하면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말을 낮술을 마실 때마다 떠든다. 아침 해장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에 가장 나쁜 술이 해장술이라고 해장술을 마실 때마다 한다. 술꾼이면 누구나 알지만 낮술과 해장술만큼 달콤한 건 없다. 내가 애정하는 맛집이 너무 널리 알려져서 결국 줄을 서야 하는 불행한 참사를 막기 위해 만들어 낸 주문 같은 거짓말들이다. 


서울에도 당연히 낮술 하기 좋은 성지들이 많다. 아니 틀린 말이다. 모든 식당이 소주 한 병 주문하는 순간 낮술의 성지로 변신한다. 김치찌개, 부대찌개, 고등어구이, 오징어볶음. 모든 식사 메뉴는 소주 옆에 있으면 안주로 진화한다. 가볍게 반주 한잔도 좋고, 아예 퍼질러 앉아 소주병을 헤아려도 아름답다. 


미국에 건너오기 전에 친구들과 낮술을 마시러 같이 갔던 중부시장 <지하식당>은 지하가 아니었다. 감바스에 와인을 한 병 꺼내 마시고, 소주와 맥주를 섞어 황태 고추장 구이와 마셨다. 이 페어링에서 모든 술은 신의 물방이었다. 마지막에 멸치 국수를 주문했는지, 소주를 한 병 또 시켰는지 가물가물하다. 소주면 어떻고 막걸리면 또 어떠한가. 


몇 년 전에 회사 동료들과 중국 쓰촨 지역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게스트하우스 근처 식당에서 우육탕면 비슷한 놈으로 아침을 먹었다. 붉고 진한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면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든다. 메뉴판을 보고 바이주를 한 병 시킨다. 아침으로 조금 독하지만 괜찮네. 


두보가 살았다는 초당을 잠깐 구경한다. 두보도 이백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다지. 술 마시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다고. 훌륭한 분이셨구만. 관복까지 맡기고 외상술을 마셨다네. 결국 술 때문에 갔다더군. 참 바람직한 인생을 사셨구만. 점심에 정체불명의 사천요리를 시키고 바이주를 다시 한 병 시킨다. 작은 잔 말고 맥주잔을 달라고 했다. 바이주 한 병을 글라스 몇 개에 그득하게 따라 나눈다. 자꾸 따를 필요 없으니 편하군.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주지육림이 여기인가. 


기차역에서 센트럴파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미국의 낮술은 버번이 좋을까 아니면 맥주가 좋을까. 갑자기 장딴지에 힘이 넘치고, 침이 고였다. 공연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유가 있었던 한 시간이 갑자기 너무 짧게 느껴진다. 빨리 찾아야 한다. 이럴 때 한국에서는 네이버에 낮술이라고 검색했을 텐데. 구글맵을 열어 일단 beer라고 넣어봤다. 오마이갓. 수백 개의 술집. 너무 많다. 평점 4.5 이상으로 필터링. 가장 가까운 곳부터 평을 읽어본다. 다른 건 필요 없다. 맥주가 맛있다는 곳을 찾으면 된다. 


여기가 맞나? 밖에서 보면 술집인지도 잘 모르게 생겼다. Other Half? 다른 반쪽? 제목은 괜찮네. 4시도 되지 않았는데 자리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바 테이블에 빈자리가 하나 보였다. 여기 앉아도 되나? 오브 코어스. 메뉴를 살펴본다. 맥주 종류가 너무 많다. 여기서 제일 인기 있는 게 뭐지? 바텐더는 잔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되물었다. 어떤 맥주를 좋아하나? 에일? 라거? 아이피에이? 앗 어떡하지. 다 좋아하는데. 일단 아이피에이. 뭐라고 한참을 설명한다. 다 알아들은 것처럼 얘기한다. 오케이. 기브 미 댓. 큰 잔? 작은 잔? 작은 건 미니어처 같아 못 쓰겠다. 아이 라이크 비거 원. 


바텐더는 친절했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지만 절대 하인은 아니라는 식의 태도. 적절한 강도의 친절과 적절한 거리. 주문하신 맥주 나오셨습니다,는 없었다. 게다가 능숙한 일처리 솜씨. 바쁘지만 여유 있는 동작들. 인테리어도 별로고 조명도 별로였지만 맥줏집의 명랑한 공기는 바텐더들이 만들고 있었다. 


안주 따위는 팔지 않았다. 팝콘도 없었고, 김과자도 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주를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술로만 승부하겠다는 건가. 갑자기 믿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번개 같은 속도로 아이페에이가 도착했다. 입에 한 모금 넣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작은 잔으로 시켰어야 했다. 다른 건 얼마나 더 맛있을까 궁금했다. 한 시간 뒤 약속이 있다는 게 한스러웠다. 취할 수는 없었다. 맥주치고 도수가 꽤 높았다. 눈을 감고 천천히 한 모금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오른쪽 사람도 혼술이었다. 수염을 산타클로스처럼 기른 남자는 스타우트 큰 걸 마시면서 뉴요커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왼쪽 남자는 맥주 여덟 잔을 한꺼번에 시켜 놓고 입맛을 다시고 있다. 메뉴판을 펼치고, 여기에서 여기까지 주세요, 라고 말한 것 같은 분위기다. 한 잔씩 마셔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안 마실 거면 저 주세요. 그럴 뻔했다. 


아이피에이를 다 마시고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 주문을 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다. 고독한 미식가처럼 보이는 왼쪽 사람에게 물어봤다. 왓 이즈 더 베스트. 캔 유 레커멘드 투 미? 기다렸다는 듯이 한 잔을 추천한다. 이름은 Past&Present. 과거와 현재. 멋지구나. 미래가 없는 술 같았다. 술을 마실 때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셔야 한다. 시켰다. 과연 맛은 내일을 잊게 하는 맛이었다. 


나에게 맥주는 술 가운데 가장 하류에 속한다. 싫어하진 않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으면 고르지 않는다. 맥주가 이 정도로 맛있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가. 혼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뉴욕이어서 그런가. 


술이 살짝 올라왔다. 대낮에 술을 마시면서 놈팡이처럼 시간을 보내는 뉴요커들이 한없이 친근해졌다. 왼쪽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두 유 러브 비어? 앱솔루틀리. 한 마디 물었는데 뭐라 뭐라 끝이 없이 떠든다. 그래 말하고 싶었구나. 내가 들어줄게.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나는 그 남자의 말을 듣는 척했다. 


아쉽지만 일어나야 했다. 여기는 무조건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바텐더에게 부탁했다. 사진 좀 한 장 찍어주라. 수염이 덥수룩하고 배가 불룩한 바텐더는 웨이러미닛, 하더니 작은 잔에 술을 조금 따라서 가져왔다. 비어 포 픽쳐. 에라 이 사랑스러운 뉴욕 바텐더 같으니라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산을 쓰지 않았다. 알코올에 몸이 데워져서 춥지 않고 시원했다. 지저분한 뉴욕 맨해튼 거리가 포근했다. 낯설기만 한 뉴요커들의 표정이 친근했다. 술기운 때문이다. 술이 깨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그러면 또 어떤가. 술 한잔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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