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가끔 테니스를 같이 치는 로이와 피트, 라티나는 나이가 육십 대 중반 정도(인 것으로 추정) 된다. 서로 나이를 묻지 않으니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다니던 직장을 얼마 전 은퇴했다는 얘기만 얼핏 들었다.
로이는 몸집이 곰처럼 거대하다. 통나무 같은 팔뚝을 보면 젊은 시절 한가락 했을 법하다. 가지고 다니는 테니스 가방도 몸처럼 거대하다. 가방을 열면 연습용 공 수십 개가 들어 있고, 라켓도 서너 개다. 각종 음료수에 손목보호대, 선글라스, 모자, 신발, 수건, 티셔츠, 송진… 없는 게 없다. 꽃다발도 나오고 토끼도 숨어 있는 마술 보따리 같다.
물건들은 하나 같이 낡았다. 손목보호대는 2차 대전 전에 샀다고 해도 믿겠다. 모자는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져서 사라질 것만 같다. 피트도 라티나도 마찬가지다. 검소함을 넘어서 약간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물론 없어 보이는 건 내 특기이기도 하다. 이들을 처음 봤을 때 무의식 중에 약간의 동류의식을 느꼈던 이유가 있었다.
테니스 게임이 끝나고 로이가 주말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자기 와이프가 동네에 있는 대학교 홀을 빌려서 콘서트를 한다는 거다. 오, 와이프가 뮤지션인가? 그건 아니다. 아마추어다. 공연이 끝나고 집에서 간단하게 파티를 할 예정이다. 꼭 와줬으면 한다.
천장이 높은 작은 홀에는 40명 정도의 청중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로이와 피트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지만, 라티나는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고 있어서 다른 사람 같았다. 하얀 머리의 노인이 과하지 않지만 정성 들여 치장을 한 모습은 꽤나 멋졌다. 관객들은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공연은 소박하고 따뜻했다. 예상외로 기술적인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다.
공연을 하기 전에 나눠준 리플릿에는 레퍼토리와 함께 로이의 아내이자 주인공인 캐롤라인의 사연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캐롤라인은 어릴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간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다. 캐롤라인은 간호사를 하면서 꾸준히 레슨을 받았고, 합창단 멤버로 계속 활동했다. 그리고 오늘 단독 리사이틀을 열게 됐다.
공연은 오페라 아리아 같은 클래식 4곡, 민요와 팝송 4곡으로 이뤄졌다. 가족과 친구들의 열띤 박수와 환호로 진행된 공연은 화기애애했고 귀는 감미로웠다. 아마추어를 넘어서는 실력이었다. 전문 엔지니어가 와서 실황을 녹음했다. 아마 음반으로 만들 계획인가 보다. 앙코르곡이 끝나고 로이가 일어나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아내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같이 한 로이는 감동의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로이의 집은 멀지 않았다. 피트는 뚜껑이 없는 작은 스포츠카를 타고 왔다. 주로 아내가 모는 차라고 한다. 2층짜리 집은 넓고 쾌적했다. 뒷마당은 광활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다. 백 년이 족히 넘은 것 같다고 말하니 로이가 백 년이 조금 모자란다고 웃었다. 로이가 가지고 다니는 낡은 테니스 장비들이 떠올랐다. 그냥 검소한 것뿐이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과일, 그리고 맥주, 와인 등이 준비돼 있었다. 손님들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집안 곳곳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눴다. 로이의 아들과 며느리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기록 전문가였다. 딸은 국제 빈곤 문제를 다루는 NGO에서 일한다고 한다. 남의 깊은 가정사를 알 수는 없지만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라고 찾아온 낯설고 젊은(?) 동양 남자에게 모두 다정했고 친절했다.
로이는 평생을 엔지니어로 일했고, 자녀들은 모두 독립했으며, 이제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고 있다. 보기 좋은 가족이네. 와인이 몇 잔 들어가니 영어가 술술 나왔다. 로이의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나에게 애가 몇 명 있냐고 물었다. 딸 하나야. 당신은 자녀가 몇 명이지? 나는 아홉 명이야. 리얼리? 인크레더블. 막내가 이제 결혼을 했다고 한다. 나이가 아흔이 넘었다.
제대로 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다고 전제하면 미국의 연금제도는 꽤 훌륭하다. 사회보장연금(Social Security Benefit)은 부부 합산 월평균 3천 달러 정도다. 여기에 401K라는 연금을 들었다면 꽤 풍족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미국은 합계 출산율이 1.6 정도다. 0.8 정도밖에 되지 않는 한국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다. 교육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고 (모두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노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다. 심지어 내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프린스턴은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공립학교가 이제 과밀 수준이라서 고민이 많다. 우리가 보기에는 신기한 풍경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은 늙어가고 있고, 출산율도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이민으로 인구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거다. ‘풍요로운 미국’이라는 신화가 얼마나 유지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