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부터 '백인 인어공주'를 그토록 사랑했었나?
미국에서 본 한국의 ‘흑인 인어공주’ 논란
(미국일기 #21)
미국에서 금요일마다 테니스를 같이 치는 사람들은 죄 노인들이다. 나 빼고 모두 60이 넘었다. 그리고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모두 백인이다. 독일계도 있고 이태리계도 있지만 어쨌든 백인이다. 원래 있던 모임에 내가 우연히 끼었기 때문이다. 이 모임이 나에게는 테니스 모임인지 영어회화 모임인지 불분명하다. 오늘은 나 포함 세 명이다. 한 명은 할머니, 한 명은 할아버지. 쉬는 시간에 수다(나에게는 듣기 평가 시간)를 떨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새로 나온 영화 <인어공주> 주인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분의 얼굴이 짧은 순간 굳어졌다. 아. 이 사람들에게는 예민한 질문이구나. 인종차별은 미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조심스러운 주제다. 레이시스트라는 말은 욕설에 가깝고, 자칫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 동양 아이(우리나라 시골 청년회장이 환갑이 넘은 것과 비슷한 느낌)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나는 아무런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뜻으로 순박한 눈을 깜빡거렸다. 할머니가 대답했다.
“누구든지 인어공주가 될 수 있지. 흑인이든 백인이든 누구든. 그런데 나의 인어공주는 하얀 피부에, 파란 눈에, 금발이었단 말이지. 개인적으로 난 그게 더 좋아.”
그리고 황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다른 사람은 아닐 수 있지…”
인어공주 콘텐츠 중 가장 유명한 건 30여 년 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여기서 인어공주의 머리카락은 빨간색이었다. 이후 빨강머리는 인어공주의 상징이 됐다. 안데르센은 머리 색깔을 특정하지 않았다. 물론 할머니에게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세상이 달라지고 있잖아. 흑인 인어공주가 뭐 큰 문제겠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는데. 하지만 변화에 보수적인 사람도 있겠지.”
한 시대를 살아온 할아버지는 잠깐 회한에 잠긴 표정이었다. 변화는 불가항력이지만 변화가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건 아니라는 느낌. 어쨌든 내가 질문하지 않았으면 아마 이런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주제라는 인상을 받았다.
인어공주 실사판이 개봉하면서 여러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해외 반응을 소개하는 기사들에서 한국도 언급이 된다. 주인공의 외모를 비하하고 인종차별적인 조롱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포털이나 유튜브 예고편에 달린 한국어 댓글을 찾아봤다. 놀라운 광경이기도 하고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주인공을 조롱하는 댓글들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분류된다.
*에리얼은 흑인이 아니다.
1989년 디즈니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비극적 결말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바꾸었다. 이야기의 핵심을 완전히 뒤바꾼 셈이다. 그건 괜찮고 이건 또 안 괜찮은가. 계속 따져볼까. 물고기와 사람이 연애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인어공주를 사랑했었을까. 정말?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건수만 하나 생기면 떼거리로 몰려가서 물어뜯고 난자하는 인터넷 부랑자들. 영화평론가 듀나가 ‘전형적인 학교폭력’의 형태라고 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주인공이 못생겼다.
소비자가 영화를 평가하면서 주인공의 외모를 언급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기준은 배역에 어울리냐가 되겠다. 할리 베일리는 인어공주를 연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못생겼을까. 디즈니는 그렇게 못생긴 배우를 2억 달러가 넘는 대작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할 정도로 멍청할까. 한국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미국에서 흥행은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잘 만든 영화인지는 논점이 아니다.)
안에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는 매우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매우 비슷한 사고방식과 문화를 가지고 매우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살아가는 아주 아주 폐쇄적인 사회다. 미국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여기는 하얀 사람, 까만 사람, 노란 사람이 뒤섞여 있다. 하얀 사람 중에는 이탈리안도 있고 러시안도 있고 터키쉬도 있다. 까만 사람 중에는 아프리칸도 있고, 멕시칸도 있고, 볼리비안도 있다. 처음에 언급했던 할머니는 지멘스라는 회사에 다녔는데, 서른 명 정도 되는 자기 부서에 출신국가가 20개가 넘었다고 웃었다. 여기는 그런 나라다. 외모의 기준이라는 게 인종에 따라서 다양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도 변화하고 있다. 지금처럼 저출생 문제가 지속이 된다면 훨씬 많은 이민자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이런 수준의 포용력이면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아시안, 특히 한국인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인종차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LA 폭동이 불과 30년 전이다. 무섭다. 내 주변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흑인 인어공주의 외모를 비하하고 조롱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