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황제 도서관의 추억
(미국일기 #15)
작년 가을 무렵 20년 넘게 밥을 먹던 기자질을 그만두고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나? 오라는 곳은 없지만 갈 곳은 많았다.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가고, 테니스를 치고, 달리기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다소 복잡한 심사를 달래느라 며칠은 그렇게 바쁘게 보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방구석에 처박혀 드라마를 정주행 할 때 가장 편안하고,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혼자 술을 마실 때 행복할 때가 많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 봤다. 좋기는 한데 잘하면 딱 폐인 될 각이다. 딸아이 보기에도 좋지 않다. 와이프에게 눈치도 보인다.
명색이 백수인데 샐러리맨처럼 시간표 보면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백수 가오가 있지. 반대로 폐인처럼 컵라면에 소주 마셔가면서 밤새 미드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대략 중간을 찾아야 했다. 중간이라는 건 참 마땅치 않다. 별 게 없다. 왜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면 북한산, 청계산에 가는지 알겠다.
당시에는 마침 소설 퇴고를 하고 있어서 조용히 앉아서 자판을 두드릴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집에서는 여차하면 잠들기 일쑤였고, 카페는 하루 종일 있기에 살짝 눈치가 보였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최적의 선택으로 수렴했는데 그곳은 바로 도서관이었다.
서울은 넓기도 넓었지만 도서관이 많기도 많았다. 집 가까이로는 학산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 정독도서관, 종로도서관, 조금만 나가면 서울도서관이 있었다. 규모 있는 도서관을 원하면 남산도서관,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면 좋다. 게다가 대부분 주민센터에는 ‘작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가까운 정독도서관을 다녔다. 오래된 도서관인 만큼 책도 많았고 앞마당도 넓었다. 열람실은 다소 답답했다. 1인용 칸막이 책상이 줄지어 놓여 있는 열람실은 (생각하기도 싫은) 고등학교 때 다녔던 독서실을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열람실 이용자 중 상당수는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다양한 고시생이었다. 소리가 날까 봐 침을 삼키기도 부담스러운 공기였다.
서울도서관은 규모도 크고 장서도 많다.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 깔끔하기도 하다. 여기는 노인분들이 많다는 게 특징이다. 덕수궁 근처가 노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기도 하고, 지하철 접근성이 워낙 좋기 때문일 거다. 노숙자도 꽤 많았다. 화장실은 언제나 지저분했다. 그런데도 열람실은 정독도서관의 숨 막히는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도서관을 그렇게 생각한다. 숨도 조심조심 쉬어야 하는 곳.
그렇게 도장 깨기를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 순례를 계속했다. 그러다 만난 곳이 장충동 쪽 남산에 있는 다산 성곽도서관이다. 남산 쪽에서 운동을 하다 우연히 들른 성곽도서관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하고 팬시했다. 북카페처럼 꾸며 놓은 공간은 쾌적하고 편안했다. 날이 좋을 때 통창을 모두 열어 두면 상쾌하고 시원했다.
결정적으로 사람이 없었다. 성곽도서관은 남산 중턱에 있어서 접근성이 꽝이다. 걸어 올라가면 땀이 날 정도의 높이다. 동네 사람 아니면 굳이 찾아갈 곳이 아니다. 몇몇 이용객들이 들르기는 했지만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도서관 직원과 유일한 이용객인 나, 이렇게 둘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잡지와 신간 위주의 장서들은 깨끗했다. 도서관 이용객이 거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도서관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 심심하면 잡지나 신간을 뒤적거렸다. 최신형 정수기는 청결했고 물은 시원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세금으로 지었을 텐데. 초기 건설 비용이 적어도 3-4억? 직원 인건비에 도서 구입에 유지 관리 비용은 한 달에 천만 원은 들어갈 게 분명했다. 아. 이명박의 황제 테니스, 전두환의 황제 축구가 부럽지 않은 황제 도서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2022년 가을, 세금 낸 보람을 만끽하며 나는 도서관에서 첫 소설을 탈고했다.
미국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동네 도서관을 찾은 건 그래서였다. 서울에서 누렸던 황제 도서관이 미국에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 미국에도 도서관이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도서관은 절대 아니었다.
퍼블릭 도서관은 이 동네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예상 밖이었다. 우리로 따지면 강남역 홍대역 사거리에 도서관이 있는 꼴이었다. 도대체 땅 값이 얼마야. 도서관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는데 집회도 하고 사람들이 앉아서 맥주도 한잔씩 하는 공간이었다. 들어가 보니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입구에는 커뮤니티 카페라는 게 있는데 사람이 바글거렸다. 도서관 내부도 꽤 북적거렸다.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지만, 체스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서울에서 보던 고즈넉한 도서관은 아니었다.
책을 빌리려면 등록을 해야 했다. 한국처럼 주소만 확인되면 무료로 등록이 가능하다. 도서관 직원은 나를 붙잡고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을 한참 동안 설명했다. 책은 물론이고 디비디,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프로그램까지 대여가 가능했다. 둘러보니 최신 콘텐츠들이었다. 뉴욕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유료 온라인 콘텐츠도 도서관 패스로 접속할 수 있었다. 음악이나 영화 같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도 도서관을 통하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도서관 패스를 받으면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도 이용이 가능했고, 뉴욕 현대 미술관 같이 꽤 비싼 전시관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건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들이었다. 자원봉사를 하는 대학생들이 중고등학생들의 숙제나 학업을 언제든지 도와준다. 이민자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는 강좌는 물론이고 세금 관련 상담이나, 직업 상담도 정기적으로 한다. 코딩이나 컴퓨터 강좌도 많고, 어린이들을 위한 체스 클래스, 어른들을 위한 보드 게임 클래스도 있다. 재즈 공연, 클래식 공연 같은 것들도 자주 열린다.
영어 커뮤니케이션 그룹에 한 번 가봤다. 자원봉사를 하는 선생이 진행하는 클래스였는데 수업 수준이 꽤 높았다. 수염이 허연 늙은 자원 봉사자는 이 도서관에서 10년이 넘게 영어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클래스는 의자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때는 도서관에서 아일랜드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커뮤니티 룸이 꽉꽉 들어찼다.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박수를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도서관이 북적북적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 도서관은 책 읽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었다. 우리로 치면 주민센터와 문화센터, 그리고 도서관이 합쳐진 곳이었다.
한국에서 백수 시절,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웬만하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적이 있었다. 장강명의 재수사를 읽고 싶었는데 정독도서관이나 서울도서관에서는 언제나 대여 중이었다.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 보니 어느 주민센터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는 대여가 가능했다. 백수는 이럴 때 유리하다. 운동도 할 겸 자전거를 타고 방문했다.
주민센터 3층에 있는 작은 도서관은 깨끗하고 조용하고, 아무도 없었다. 책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깨끗했다. 아무도 펼치지 않은 새 책이었다. 대여를 해 줄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나? 작은 도서관과 연결된 작은 열람실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군가 앉아 뭔가를 공부하고 있었다. 중년의 남성이었다.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물었다. 누구시죠? 책 좀 빌리러 왔는데요? 아… 남성은 도서관 직원이었다. 분위기를 봐서는 주민센터 직원인 것 같기도 했다. 도서관 직원은 도서관에 방문한 이용객에 놀라고 있었다.
한국에서 유행처럼 도서관을 지은 적이 있었다. 도서관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은 무엇을 하는 공간일까. 도서관은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