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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Apr 04. 2023

존댓말을 모르는 미개한 미국인

영어로 배우는 반말의 미덕

(미국일기 #14)


시에서 운영하는 테니스 클래스에 등록을 했다. 로버트라는 남자가 내 이름을 처음 듣더니 한국에서 왔냐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한국인 지인이 있단다. 기아 니로를 타고 다닌다. 좋은 차라며 자랑이 진심이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로버트와 오늘 나눈 대화를 한국어로 옮기면 이렇다.


야, 로버트. 좋은 아침. 오늘 어때?

어이 킴. 날씨가 테니스 치기 딱 좋네. 넌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어?

주말에 뉴욕에서 공연 봤지. 넌 어때.

야. 부러운데. 난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갔었어. 오늘 잘 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조심해. 다치면 앞으로 테니스 치기 어려울 지도 몰라.


이 한국어 번역은 매우 정확하지만 또한 매우 어색하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로버트는 일흔이 훌쩍 넘은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로버트랑 나랑은 25년 정도 차이가 난다. 두 바퀴 띠동갑보다도 나이가 많다. 로버트의 아들이 내 나이 정도다. 하지만 나는 로버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영어에는 존댓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헤이 로버트”라고 부른다. 로버트는 “헤이 킴”이라고 말한다. ‘키웅내’라는 내 이름은 발음이 어렵다. 계속 키영 키융 하면서 앵앵거려서 그냥 킴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테니스 클래스에는 한국인이 나 말고는 없어서 킴이 하나다.


말이 편하다 보니 손도 쉽게 나간다. 말을 하면서 로버트의 어깨에 손을 어깨에 손을 얹거나 등을 툭툭 치는 경우도 생긴다. 한국에서는 꽤 친한 또래들끼리나 하는 행동이다. 오늘도 헤어지면서 인사를 나누다 나도 모르게 로버트의 등을 툭 건드렸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속으로는 움찔했다. 하늘 같은 어르신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미국 오랑캐의 습속에 물들어 동방예의지국의 법도를 팽개쳐도 유분수지.


대학을 다닐 때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수강생이 백 명이 넘는 전공 통계학 수업이었다. 꽤 유명하고 인기가 있는 교수였다. 두 가지가 기억이 난다. 그 교수는 첫 수업에서 난해한 수학 문제를 냈다. 당시 수업에 큰 관심이 없어서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문제였다. 살면서 몇 번째 만난 이성을 배우자로 선택하면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을까? 교수는 학기가 끝날 때 대형 강의동 칠판을 수식으로 가득 채우면서 그 문제를 실제로 풀었다. 문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교수가 문제 푸는 자세는 나름 멋졌다.


다른 하나는 그 교수의 말이다. 한국에서 없애고 싶은 게 몇 개 있다고 했다.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나가 존댓말이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았지만 좀 재수가 없었다. 미국 물을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미국 사람 행세 하기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교수의 말은 점점 더 사무쳤다. 교수는 아마도 수학 문제를 푸는 건 쉽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풀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본도 그렇다고 하지만 한국어의 존칭과 높임말은 꽤나 엄격하고 복잡하다. 말도 말이지만 말과 실제 관계가 얽히면 삼차방정식 정도는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룰이 있었다. 재수한 동기는 반말, 삼수한 동기는 형이라고 하면서 존댓말을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재수한 애는 삼수한 형한테 반말을 해야 하나, 존댓말을 해야 하나. 고등학교 1년 선배는 대학과 관계없이 여전히 선배였다. 고등학교 1년 선배가 삼수를 해서 대학을 1년 밑으로 들어오면? 이쯤 되면 그 과의 호칭과 서열 정리는 양자물리학에 버금가게 된다. 이런 어이없는 풍경은 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계속 보게 된다. 공채, 경력 등의 기수와 연결되면서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말을 말자.


우리는 보통 1년 먼저 태어났는지 아닌지, 1년 먼저 어디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미세하게 집단을 나눈다. 그러다 보면 5년은 아득해지고, 10년은 보이지도 않는다. 까마득한 후배, 까마득한 선배 따위의 표현은 여기에서 나왔을 거다. 20년? 그건 서로 공유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화성과 금성 정도가 아니라 은하가 다른 종족이다.


한국에서 지하철을 타면 어르신들은 경로석에 오글오글 모여 있다. 나이 든 노인이 경로석 섹션이 아니라 다른 쪽에 오면 모두들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경로석은 게토가 된 지 오래다. 덕수궁과 탑골공원에는 노인들이 모여 산다. 망원동과 가로수길에는 젊은이만 버글버글 하다. 연령 제한이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가급적 서로 넘지 않는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사와 가족이 아닌 관계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함께 사적으로 뭔가를 도모하는 걸 주변에서 본 적이 있나.


한국에서 테니스는 대표적으로 ‘분리주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테니스 메이트를 매칭해 주는 앱에서 연령 제한을 디폴트로 주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2-30대는 40대 이상과 게임을 하려고 들지 않는다. 나이 든 꼰대들이 테니스장에서 어떤 텃세를 부리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노인은 노인들끼리, 중년은 중년들끼리, 청년은 청년들끼리. 다른 종족을 끼워주지 않는다.


여기 테니스 클럽에 갔더니, 70대 할배 할매부터, 20대 대학생까지 나이에 대중이 없다. 동네 테니스장에서 벽치기를 하고 있으면 노인하고도, 애들하고도 같이 치게 된다. 러닝 클럽이 유행이다. 그냥 떼를 지어 뛰어다닌다. 크게 재밌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같이 뛰는 무리를 보면 연령대가 다양하다. 우리 눈에는 신기하다.


이분 나이도 75세다. 우연히 같이 테니스를 치고 헤어질 때 이렇게 말했다. 헤이 피터. 씨 유 어겐. 대답은? 앱솔루틀리.


물론 미국이라는 곳에 세대 갈등이 없을 리가 없다. 이른바 꼰대에 대한 거부감도 있을 거고, 풋내기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을 거다. 그런데 갈등의 표출되는 양식이 우리와 다른 건 분명하다. 그 차이에 서로 반말을 하는, 존댓말을 하지 않는 언어가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서 존댓말을 없애고 싶다던 그 유학파 교수의 재수 없었던 푸념은 그야말로 푸념에 불과하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지 거의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의 세대 갈등은 점점 더 누적되고 있다. 갈등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이제 그냥 아무것도 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에게 손해다.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데, 모두들 포기했다. 방법을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같이 테니스 클래스를 듣는 대학생이 오늘 헤어지면서 나에게 말했다.

 

헤이 킴. (야, 킴.)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좋은 하루 보내.)

땡스. 유 투. (고마워.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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