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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Apr 22. 2023

미국 명문대의 가짜 대학생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미국일기 #16)


“Are you a student?”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하는 학생 식당 직원이 갑자기 나를 노려 보더니 (옛날)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문장으로 물었다.


매주 금요일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테니스 클래스에 간다. 가는 길이 동네에 있는 대학 캠퍼스를 정확하게 관통한다. 이 동네 대학이라는 곳이 꽤나 거대해서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자그마한 도시지만 도시 전체가 대학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특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인 데다가 교정에 학생들이 많아서 속도를 내기가 어렵다. 한 번 정도는 지쳐서 쉬어가는데 그때가 하필 점심시간이 된다. 집에 가면 기진맥진 밥을 해 먹기가 귀찮다. 하루는 일부러 학교 구내식당을 찾아서 들어갔다.


이 대학 이름이 프린스턴인데 나름 유명한 명문(?)대라고 한다. 일찍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유학을 했던 곳이고, 가까이로는 정운찬 전 총리가 박사를 받은 곳이다. 연식이 있는 분들은 브룩 쉴즈를 기억하실 거다. 이 양반이 여기 나왔다고 ‘예쁜 데다가 공부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우리한테 유명한 사람은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 정도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한테는 그냥 집 옆에 있는 동네 대학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공부를 잘할 것 같이 생기지도 않았다.


학생 식당은 한 끼에 10달러 정도다. 한국 기준으로는 싸지 않지만 여기 물가를 생각하면 저렴한 편이다. 결정적으로 팁이 없다. 영수증을 보면 텍스도 붙이지 않는다. (미국은 상품 가격에 항상 세금이 따로 붙는다.) 학교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메뉴도 훌륭하다. 햄버거 같은 미국식, 연어와 두부 덮밥 같은 할랄푸드, 중국식 깐풍기 볶음밥 등 바깥 레스토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중국식 메뉴에는 김치를 준다. 조금 어설프지만 맛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밥을 먹고 내친김에 커피를 한 잔 사서 학생 회관에 눌러앉았다. 호르몬이 넘치는 어린 학생들 특유의 소음이 매우 시끄럽지만 영어라서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나한테는 백색소음처럼 느껴진다. 글을 쓰기에 나쁘지 않다. 동네 도서관 패스를 이용하면 대학 도서관도 출입이 가능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만의 공간을 찾았다. 여기 대학은 공간이 무척 여유로워서 숨어 지내기에 적절한 공간이 너무 많다.


놀라울 정도로 규모가 큰 프린스턴 도서관. 그냥 한번 찍어봤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대학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 주 두 주 지나면서 도서관에서 어디가 채광이 좋은지, 어느 식당이 맛이 있는지, 어느 벤치가 풍경이 좋은지 알게 됐다.


수지가 연기한 <안나>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 안나는 대학에 떨어졌지만 부모에게 말할 수가 없어서 가짜 대학생 행세를 시작한다. 학교를 기웃거리다 대학 신문사에까지 들어가 활동한다. 이후 안나는 온갖 가짜 인생을 살다 결국 파멸한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도 가짜 대학생( 논란)은 항상 있었다. 1980년대 유시민이 연루된 서울대 프락치 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짜 대학생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캠퍼스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노숙자 같은 차림으로 중앙도서관 매점과 학생회관을 배회하는 남자는 부랑자에 가까워 보였지만 어느 과 복학생이다, 아니다 국정원 프락치다, 아니다 고시에 떨어져서 마음에 병이 생긴 낭인이다,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보이지 않으면 안부가 궁금했다. 양말부터 팬티(는 확인하지 못했지만)까지 파란색으로 도배를 한 이른바 ‘블루 싸이코’도 있었다. 블싸는 항상 파란색 옷을 입고 도서관에만 출몰했다. 블싸가 가짜 대학생이라는 주장과 대학의 음기를 막기 위해 활동하는 도인이라는 설이 팽팽하게 맞섰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블싸는 진짜 학생이었다. 나중에 박사까지 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항상 주황색 등산 점퍼를 입고 도서관과 식당 등에 출몰하는 키 작은 동양인을 프린스턴 대학생들은 어떻게 볼까. 아마 대부분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혹시 예민한 누군가는 나를 중국에서 보낸 프락치라든가, 혹은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돼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는 중년 낭인쯤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동안 단 한 번도 나의 신원을 궁금해하지 않던 학생 식당 직원이 갑자기 나에게 학생이냐고 묻는 이유는 뭘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학생이라고 주장하면 학생증을 보여달라고 하는 거 아닐까. 설마 학생이 아닌 사람이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는 건 아니겠지. 미국에서는 이게 죄가 되는 걸까. 체포 돼서 뉴스에 나오는 걸까.


거짓말은 안(못) 했다. “No. I am a visitor.” 다행히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포스기로 눈을 돌렸다. 근데 왜 물었지? 이번에는 내가 물어봤다. “If I am a student, is it cheaper?” “No tax for students.” 학생에게는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영수증을 받아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세금이 50센트 정도 더 붙어 있었다.


어느 주말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 학교를 걸었다. 백 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학교 건물 사이를 걸으면서 어느 정원이 좋은지, 어느 카페가 맛있는지 같이 산책하는 사람에게 설명했다. 이 사람은 이런저런 설명을 듣더니 가짜 대학생 아니냐며 혀를 끌끌 찼다.


초저녁 어스름의 교정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길고 긴 겨울에서 해방된 학생들은 봄의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고 있었다. 여기저기 잔디밭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깔깔거린다. 봄볕에 따뜻하게 달궈진 돌계단에 한 여학생이 퍼질러 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린다. 빨간 물감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꽃망울이 주렁주렁한 나무 아래 벤치에는 싱그러운 남녀가 서로를 희롱한다.


30년 전 나도 저렇게 싱싱했겠지.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터무니없는 낙관으로 세상에 부러운 게 없었던 그 시절이 생각이 났다. 그래. 나는 지금 가짜 대학생이지만 저들은 진짜 대학생이다. 저들과 나 사이에는 30년이라는 숫자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젊음과 늙음 사이에는 숫자보다 더 깊고 깊은 차이가 존재한다.


보기 좋은 풍경들. 아련한 기억들.

그런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설사 타임슬립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고민은 하겠지만 돌아가지 않을 거다. 보기에는 싱그러울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징글징글했던 그 시절. 꽃은 보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꽃이 행복한 건 아니다. 그토록 강렬한 색채 고통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그 시절의 호르몬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 거리에 대한 감각이 없던 시절. 뭐든지 몸에 바짝 붙여서 만져보고 깨물어보고 삼켜봐야 직성이 풀렸던 아이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적당한 거리’가 주는 평온함을 깨달았다. 이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또 샜다. 다시 돌아가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다른 직원들은 나를 그냥 대학생이라고 생각하고 계산했다는 말이 된다. 내가 20대로 보였다는 뜻이다. 피부가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직원은 왜 나를 대학생으로 보지 않았을까. 따져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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