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돈보다 중한 게 있지요
‘조지 오웰도 아닌 나는’ 왜 쓰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돈은 사람을 춤보다 더한 짓도 하게 만든다. 아이가 차에 깔리면 자신도 모르게 괴력을 발휘해 차를 들어 올리는 엄마처럼, 입금노동자는 통장에 숫자가 찍힐 때 비로소 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임금 노동자건 입금 노동자건 돈을 받는 프로페셔널이 되면 모든 게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애써 모른 척할 뿐이지 ‘일’의 사전적 정의는 ‘하기 싫은 것’이다.
뒤늦게 테니스에 빠져서 미친놈처럼 하루에 몇 시간씩 공을 치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아. 돈 받고 이 재미있는 테니스를 치는 프로 선수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정말? 예전에 테니스 레슨을 하던 선출 코치는 나에게 공을 던져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수 시절에는 포핸드 백핸드 2백 개씩하고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했어요.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요. 다들 그래요. 그치만 이걸 안 하면 안 돼요.”
무슨 일이든 돈을 받으면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달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돈을 받을 수가 없다. 퀄리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은 꽤나 고통스럽다.
어릴 때 태권도장은 나에게 놀이터였다. 겨루기는 좀 무서웠지만 품새는 폼이 났고 노란띠가 검은띠가 되는 과정도 성취감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나. 사범님이 몇 달 뒤에 열리는 대회에 나가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다음날부터 새벽 훈련이 시작됐다. 마침 겨울이었고 새벽에 일어나는 건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형들하고 같이 미친놈들처럼 기합을 지르면서 도로를 구보했고, 사범은 정권을 단련해야 한다며 아스팔트 바닥에서 주먹을 쥐고 푸시업을 시켰다. 그날 저녁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다음날 새벽 훈련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나를 잠시 빤히 보더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취미로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는 극장은 열락의 공간이지만, 영화를 보고 다음날까지 리뷰를 써야 하는 평론가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감은 어마어마한 고통이 된다. 째깍 째깍 째깍. 이 고통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나는 왜 쓰는가>를 읽어보면 존경하는 조지 오웰 영감님은 글을 쓰는 이유를 대략 4가지로 나눴다.
1. 순전한 이기심
2. 미학적 열정
3. 역사적 충동
4. 정치적 목적
물론 돈 때문에 쓰는 건 제외한 거다. 돈은 디폴트고 다른 걸 정리한 것 같다. 번역을 해서 단어들이 좀 어색하다. 조금 자연스러운 단어로 바꾸면 이해가 쉽다.
순전한 이기심은 허영심에 가깝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심. (아. 설득력이 있다.) 미학적 열정은 쉽게 말하면 ‘재밌어서’다. 역사적 충동은 진실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다. 정치적 목적은 남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내가 기자 시절 썼던 글들은 대략 3번과 4번에 해당한다. 그때는 어깨에 뽕도 좀 들어갔다. ‘진실 말고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 뭐 대략 그런 뽕이었다. 지금도 없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어깨 뽕이 넘치는 글은 읽기가 싫고 쓰기도 싫다.
그럼 지금은 뭘까. 1번은 너무 기본적인 욕구라서 돈과 마찬가지로 디폴트에 해당한다. 그럼 남은 건 2번.
잘 달리지는 못하지만 요즘은 가끔 동네를 뛴다. 추워서 테니스 치기가 힘들어서 마땅한 운동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3-40분 정도를 뛴다. 살짝 땀이 날 정도로.
아침에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면 춥다. 살짝 뛰어보면 다리도 무겁고 손은 시럽고 얼굴이 따갑다. 짜증이 나지만 기왕 나왔는데 벌써 돌아갈 수는 없다.
1분. 내가 왜 미국에서 이렇고 있는 걸까. 2분. 벌써 숨이 차다. 3분. 저기 백인 아저씨는 이 겨울에 왜 반바지를 입고 뛰는 걸까. 4분. 저쪽 레깅스 아줌마는 너무 빠르다. 역시 서양인들은 체력이 다른가 보다. 저렇게 뛰면 나는 죽는다. 5분. 뭐야. 왜 더운 거야. 후회하면서 잠바를 벗는다. 6분. 오오오. 땀이 살짝 나기 시작한다. 7분. 하얀 입김을 후후 불면서 뛰는 나의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인다. 자아도취. 8분. 다리가 점점 가벼워진다. 9분. 나도 속도를 좀 내 볼까. 10. 아니다. 페이스를 유지하자. 30분은 거뜬히 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를 느낄 정도로 달려본 적은 없다. 대략 30분 정도를 달리면 느낄 수 있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달리기도 (놀랍게도) 재미라는 것이 있다.
자. 오늘의 미션. 사랑하던 철수와 영희는 이번 챕터에서 헤어져야 한다. 철수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철수는 영희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술을 마시다가? 문자로? 여행을 가서? 너무 통속적이다. 그럼? 잠수를 탈까? 불치병에 걸렸다고 속일까? 일부러 영희의 속을 긁을까?
글을 쓰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낙서를 해 보기도 하고, 거리를 걸어 보기도 한다. 잠깐 잠을 자기도 한다. 혹시 꿈에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까. 그러다. 그러다가. 그러하다가. 어느 순간 생각이 난다. 아니 지쳐서 결정을 한다. 그래. 문자를 보내보자.
철수가 영희에게 문자를 보낸다. 자니? 아니. 할 말이 있어. 뭔데? 우리 헤어지자. 영희는 전화를 걸어서 물어본다. 자다가 무슨 봉창을 두드리는 거니? 다음날 만나기로 한다.
그렇게 만난 철수와 영희의 대화가 어쩐지 술술 쓰인다. 그렇게 무사히(?) 철수와 영희는 헤어진다. 대사는 특별히 상투적이지 않고, 철수와 영희의 감정이 느껴진다. 와. 시벌. 나는 천재인가. 조지 오웰이 울고 가겠구만.
고통스러운 달리기를 하다가 잠시 잠깐 느꼈던 아주 짧은 쾌감처럼, 글을 쓰다가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확 뿜어져 나올 때가 있다. 조지 오웰 영감님이 말씀하신 ‘미학적 충동’은 너무 거창하지만 그 즐거움을 이길 수 있는 게 있을까. 재미를 이길 수 있는 건 세상에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아니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