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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Dec 11. 2023

재미가 있으려면 생각이 좀 없어야 합디다

*앞에 붙이는 사족

내가 기자 생활을 20년 넘게 했지만 소설이라는 영역에서는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래서 이 글은 성공담이 아니라 (아직) 실패담에 가깝다. 희망회로를 돌려서 ‘예비’ 성공담 정도로 부르면 기분은 좋겠다. 하지만 이게 진짜 성공담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기 객관화를 해보면 나이나 능력치를 고려할 때 아주 낮은 확률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글 쓰는 데에서 실패했다고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지 않나.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마 10년도 더 넘은 것 같다. 물론 대학 다닐 때 재미 삼아 한번 쓴 적도 있으니까 그걸 포함하면 근 30년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지현과 사귀고 싶다고 다 사귈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자 시절 이건희 몰카 동영상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거 누가 소설로 쓰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도 쓰지 않았다. 나라도 써 볼까. 에이 무슨. 바빠 죽겠는데. 기사나 잘 쓰자.


미련이 남았다. 심심풀이로 줄거리를 한번 구상해 봤다. 맘에 안 든다. 에이 무슨. 바빠 죽겠는데. 기사나 잘 쓰자.


구글 드라이브를 정리하다가 1년 전쯤 써 놓은 소설 줄거리를 우연히 발견했다. 어라. 괜찮은데. 등장인물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본다. 맘에 안 든다. 에이 무슨. 바빠 죽겠는데. 기사나 잘 쓰자.


다른 사람의 소설을 읽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1년 전쯤 캐릭터를 메모한 게 있었는데. 드라이브에서 검색을 해 봤다. 있다. 오호. 괜찮은데. 시작과 결말을 한번 바꿔본다. 맘에 안 든다. 에이 무슨. 바빠 죽겠는데. 기사나 잘 쓰자.


검찰 쪽 취재를 한 걸 가지고 논픽션을 하나 쓰게 됐다. 책 제목은 <죄수와 검사>. 동료 기자와 같은 쓰는 책이었다. 편집자도 만나고 마감이 정해졌다. 여름휴가를 갈아 넣어서 200페이지가량을 썼다.


몰랐다. 쓰는 게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났다. 내가 왜 소설을 쓰다 말았지? 다시 뒤져봤다. 아이디어와 줄거리, 인물 메모가 수십 개다. 그러다 깨달았다. 구상만 하고 메모만 하고 실제로 써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설계도만 그리다가 벽돌 한 장도 올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쓰자. 이제 써 보자. 그냥 써 보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해 보자. 퇴근을 하고 밤에 집에서 쓰기 시작했다. 인생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술약속도 가급적 잡지 않았다. 집에 빨리 들어가서 다음 페이지를 쓰고 싶었다. 석 달 만에 장편소설 한 편 분량을 썼다. 세상에 이걸 내가 썼단 말인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게 나온 책이 <삼성동 하우스>다.


이제 회사를 그만두고 글만 쓴다. (물론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있다. 시작은 했다. 시작을 해야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이제 알고 있다. 오늘을 살아야 내일이 오고, 일 년을 산다. 1미터를 뛰어야 1킬로를 뛴다. 한 줄을 써야 두 줄을 쓰고 한 장을 쓰고 한 권을 쓴다.


하지만 중간중간 막히기 마련이다. 막다른 길. 높은 벽. 우회로도 없다. 이 남자와 저 여자가 헤어져야 하는데 헤어지고 어떻게 만나는 거지? 다시 만나면 과거의 감정이 그대로 일까. 많이 변했을까. 다시 만나서 어디로 가는 거지? 생각이 많아진다. 이 남자의 친구는 뭐라고 충고를 할 것인가. 저 여자의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설계도가 점점 복잡해진다.


이렇게 구상해 보고, 저렇게 설계를 해 본다. 메모도 해보고, 낙서도 해 본다. 상투적이다. 구태의연하다. 기시감이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드라마를 본다. 한 시즌을 정주행 한다. 달리기도 해 본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 술을 마셔 본다. 역시 별 소용이 없다.


막다른 길에서 만난 벽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벽을 깰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벽은 두껍다. 숟가락을 들고 벽을 긁으면 한 시간에 백 그램을 긁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이면 벽돌을 10분의 1쯤 파 낼 수 있다. 두 달이면 벽돌 한 개. 1년이면 여섯 개. 한숨이 나온다. 견적이 안 나온다. 어디서 포클레인을 들고 오고 싶은데 그런 건 없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시작한다. 도저히 설계가 안 나오지만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그냥 시작한다. 이 남자와 저 여자를 일단 헤어지게 한다. 각자 살게 만들어 본다. 그 감정으로 일도 시켜보고 술도 마시게 한다.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오묘하게도 얘들이 다시 만난다. 잘 이어지지 않던 스토리가 연결이 된다.


이렇게 제일 힘든 부분이 넘어갔다. 다시 달린다. 벽돌이 한 다섯 개가 빠지니까 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광활한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은 그때 소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번’ 써 본 거다. 물론 가장 후회스러운 것도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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