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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Dec 18. 2023

안타깝지만 글쓰기는 노동이(어야 하)더라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10년이 훨씬 넘었다는 느낌 정도만 있다. 그날도 아마 취재가 잘 안 풀린다는 핑계로 점심시간에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봤었나? 어쨌든 그랬다. 한국은행을 출입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극장은 한은에서 가까운 명동 CGV.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시간이 맞는 영화는 ‘미스트’ 하나였다. 오호라. 쇼생크 탈출, 그린마일 감독이라. 거기에 이번에도 원작이 스티븐 킹. 영화는 압도적이었다. 점심을 먹지 못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괴물이 나오는 공포 영화인데 거기에 종교와 인간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중 소설 혹은 장르 소설에 대해서 조금 얕잡아 보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스티븐 킹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었다. 쇼생크 탈출처럼 휴머니즘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책을 몇 권 읽어 봤다. 스탠 바이 미. 쇼생크 탈출. 중편인데 단편 소설을 읽는 정도의 시간밖에 들지 않았다. 영화보다 좋은데? 스탠 바이 미와 쇼생크 탈출이 들어가 있는 중편집은 ‘사계’인데 두 개만 번역이 된 것 같았다. 내친김에 영어 책을 사서 네 편을 모두 읽어 봤다. 다시는 소설을 영어로 읽지 않기로 했다. 


스티븐 킹이 놀라운 건 소재가 지나치게(!) 다양하다는 점.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관심사를 가질 수 있을까. 또 하나는 다작. 극단적인 다작. 장편이 50편, 단편은 200편이 넘는다는 걸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어떤 장편은 딱 열흘 만에 탈고했다고 한다. 인간인가 (너무 일찍 만들어진) AI인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쓴 책들이 모두 베스트셀러다. 스티븐 킹은 전화번호부를 써도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농담도 있다. 영화화가 가장 많이 된 소설가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내친김에 스티븐 킹이 쓴 일종의 작법서 ‘유혹하는 글쓰기’도 읽어봤다. 거기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거다. 스티븐 킹은 공장 노동자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을 글을 쓴다는 사실. 예전에 조정래 작가도 글을 쓸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들었다. 스티븐 킹도 조정래 같은 거장도 그렇게 지독하게 글을 쓴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대략 쓰고 싶은 때 쓴다. 맘을 잡은 데 하루가 걸리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하루가 더 걸린다. 밤을 새워 쓰고 너무나 감격해서 일주일을 논다. 밤에 조금 쓰다가 낮에는 하루 종일 잔다. 이게 나 같은 지망생 따위가 할 일인가. 


구상하고 있는 소설을 쓰다가 얼마 전 미국으로 넘어왔다. 시차 적응을 핑계로 일주일을 놀았다. 머릿속에서 생애 최고의 걸작을 구상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자고 다짐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굳이 오늘부터 쓸 이유가 있겠나. 다이어트도 내일부터이고, 집필도 내일부터다. 내일 쓰면 지구가 망하나. 쇠털 같이 많은 날들이 나에게 남아 있다. 


집을 떠나야 했다. 집에는 누울 곳이 너무 많다. 너무 편하다. 벗어나자. 처음에는 역시 만만한 스타벅스. 아. 미국 스타벅스는 너무 시끄럽고 산만하다. 노트북을 놓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조금 부담스럽다. 다음은 동네 퍼블릭 도서관. 다 좋은데 9시에 문을 연다. 조금 일찍 시작하고 싶은데 애매하다. 꼬맹이들이 너무 많아서 소란스럽기도 하다. 


운전을 하다가 밤에 불이 켜져 있는 도서관을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아마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 중 하나일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자전거를 타고 가봤다. 세상에. 학생이 아니어도 이용이 가능했다. 8시에 문을 연다. 사람이 적어서 조용하고 깨끗하다. 

프린스턴 신학대 도서관

시설이 지나치게 럭셔리하고 고풍스러워서 무슨 도서관인지 찾아봤다. 신학대 도서관이었다. 어쩐지 홀리하더라.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여기가 내 작업실입니다. 


이제 딸아이 아침을 챙겨주고 집을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간다. 스티븐 킹은 하루에 많을 때는 2-3천 단어를 썼다고 한다. A4로 따지면 10장이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황새를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 나의 목표는 5장이다. 


젠장 도서관에도 편안한 소파가 있다. 졸리면 가끔 잠을 잔다. 어쩌겠나. 잠이 오는데. 하지만 하루 5장을 쓰자. 나는 혼자 일하는 집필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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