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면 뭐든 재미있고, 즐겁고, 막 신나고 그럴 줄 알았다. 생전 처음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다.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고, 외박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자유롭게 인생(?)을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소개팅도 하고 미팅도 하고 연애도 막 하고 그럴 줄 알았다.
일부는 맞았고 일부는 틀렸다. 술은 참말로 마음대로 마셨다. 물론 맥주도 비싸서 소주를 먹는 신세였지만 아무리 취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만취가 돼 쓰러져도 술집에서 자면 그만이었고, 친절한 선배들이 이름 모를 하숙집이나 자취방으로 데려다주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선배의 하숙집이었다. 아니 아침이 아니라 점심 무렵이었다. 선배는 해장하러 나가자고 보챘다. 다솜식당이었나. 세 명이었나. 소짜였나 대짜였나. 아무튼 감자탕이라는 메뉴를 시켰다. 머리 털나고 감자탕은 처음 먹었다.
넓고 낮은 냄비에 감자와 뼈다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 위에 깻잎이 미륵사지 석탑처럼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아주머니는 블루스타에 불을 켰다. 탑이 높아서 뚜껑을 덮지도 못했다. 아니 덮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깻잎이 숨을 죽였다. 국물을 한 숟갈, 고기를 한 점, 감자를 한 입. 머리 털나고 이렇게 환상적인 음식은 처음 봤다. 뼈다귀 감자탕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니까 이쯤 하고 넘어가자.
그렇게 술은 쉬웠지만 여자는 어려웠다. 미팅을 몇 번 나갔지만 촌구석에서 올라온 키 작고 두꺼운 안경 쓴 놈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연애는 개뿔. 술이나 마시자.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겨울 방학이 됐다. 집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1년짜리 기숙사도 끝이 났다. 친구와 함께 자취방을 하나 얻었다. 자취방을 얻은 기념으로 또 술을 마셨다. 며칠을 마시고 일어나 보니 크리스마스였다.
“약속 있냐?”
“아니. 너는.”
“없지.”
둘이 있어 쓸쓸하지는 않았지만 한심했다.
“뭐 할까?”
“밥이나 먹자.”
“돈 없는데.”
“학교 식당 문 열었을까?”
“아마.”
“가자.”
학생회관 식당이 영업을 하지 않았다. 이러니 한국의 대학 경쟁력이 이 모양이지. 9백 원이었나 천 원이었나. 더럽게 맛은 없었지만 허기는 달랠 수 있는 식당이었다. 평소에 식권을 하나 사서 나눠 먹었다. 고기반찬 빼고 리필은 무제한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왜 한국 대학의 식당이 문을 열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다. 뭐 할까.”
“글쎄.”
동아리방에 올라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남들은 크리스마스에 약속이 있는 모양이다. 노래책을 펴고 기타를 더듬더듬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담배도 피웠다. 그 시절은 실내 흡연이 가능했던 다른 세상이었다.
동아리 문이 열렸다. 얼굴만 아는 선배 누나가 들어왔다. 5년 정도 선배였나. 친하지는 않지만 반가웠다. 짜장면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
“뭐 하니. 크리스마스에.”
“할 일이 없어서 학교 왔어요.”
선배 누나는 뭔가 공부할 일이 있어서 학교에 온 모양이었다. 책을 펴고 뭔가를 하다가 우리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밥은?”
“아직요.”
“우리 절에 갈까? 1시간이면 갈 거야. 학교 뒷산에 암자.”
“오늘… 절에요?”
“응. 밥도 줘.”
크리스마스에 절에 가자고 하는 누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별로 할 일이 없었던 우리는 얼굴만 아는 누나와 함께 절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기억이 모호하다. 땀을 흘리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은 난다. 그런데 그날 우리는 암자에 갔었나. 암자에서 점심 공양을 한 게 그날이었나. 예수보살 탄생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를 본 게 그 크리스마스였나. 그 누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늘 크리스마스이브다. 미국 크리스마스도 별 게 없다. 새벽 5시에 잠이 깼다.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먹을 국을 끓이려고 멸치를 몇 마리 넣고 물을 뺐다. 다시 잘까. 잠이 안 온다. 드라마를 볼까. 내키는 게 없다.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글을 써봤다.
글을 쓰는 건 크리스마스에 절에 가는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