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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Dec 31. 2023

글이 비수가 되어 날아다니는 세상

고등학교 때 학교 신문을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 축제라든가 홈커밍데이 같은 학교 행사가 있으면 관련 기사를 쓰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이 관심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 기획하고 취재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일종의 관제 매체였다. 


특이한 건 신문 발행 비용을 학교에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반 학생들이 책임져야 하는 구조였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갹출하는 것은 아니고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삥’을 뜯는 형태였다. 


신문에 광고를 실어드릴 테니 돈을 주시오. 주로 학교 근처 의사들을 찾아갔다. 대부분 학교 선배들이었다. 지난 신문을 내밀면서 이렇게 이름을 실어드릴 테니 적당히 성의를 표시하라고 하면 대부분 돈을 쥐어 줬다. 일부 신문사들이 지금도 실행하고 있는 조폭식 영업을 고등학생들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신문을 찍고 남은 돈으로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소주를 사먹었다. 


고2 때였던 것 같다. 당시 학교에도 학생회라는 것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반별로 회의를 하고 그 안건을 ‘상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하지만 입시가 최우선인 한국의 전형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생회라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일종의 관제 조직일 뿐이었다. 신문반처럼 말이다. 


어느 날 왜인지는 모르지만 ‘학생회가 매우 형식적을 운영되고 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신문에 게재할 기사는 모두 지도교사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국어 선생이었던 지도 교사가 나를 교무실로 호출했다. 지도 교사는 학교에서도 다소 괴짜로 통하던 선생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지도 교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교무실에서 선생들이 마음대로 담배를 피우고, 뒷산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 걸린 아이들은 선생에게 죽을 정도로 맞던 시절이었다. 


“담배는 역시 성냥맛 아이겠나. 안 그렇나?”


지도 교사는 내가 모아서 전달한 원고 뭉치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니가 쓴 기사는 잘 읽었는데… 니 그거 아나? 남자는 세 끝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들어 봤나?”

“아니요.”

“세 끝이 뭐겠노?”


질문의 답도 모르겠지만 질문의 의도가 파악이 안 됐다. 한 가지는 알겠다.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첫째, 혀 끝. 말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알제? 둘째, 좆 끝. 남자는 이걸로 패가망신한다. 그럼 세 번째는 뭐겠노?”


한국말은 하고 싶은 말이 맨 뒤에 나온다. 가만히 들었다. 


“붓 끝. 글이라는 게 칼보다 무서울 수도 있다. 남도 다치게 하고 글 쓰는 놈도 다칠 수가 있다 이 말 아이가.”


지도 교사 선생님아. 너의 혀 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기사 잘 읽었다. 가서 제작해라.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데, 명심해라. 붓 끝을 조심해야 한다. 알겠제?”


내가 쓴 글이 뭔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꼰대 아저씨의 모호한 설교는 전체적으로 불쾌했지만 한 가지는 기억에 남았다. 


“글이라는 건 칼보다 무서울 수도 있다.”


배우 이선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두들 경찰의 수사가 문제가 있었다고 한 마디씩 한다. 사법살인. 맞는 말이다. 경찰이 던져주는 소스를 무책임하고 자극적으로 기사화한 언론이 사람을 죽였다고 비난한다. 언론의 기사는 칼이 되어 이선균을 베었다.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말이다. 


조리돌림이라는 게 있었다. 죄 지은 자를 길바닥에 끌고 다니면서 망신을 주는 형벌이다. 내가 어릴 때도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다. 남자와 바람을 피운 여자 머리채를 잡고 시장 바닥을 끌고 다니던 사람들. 


다들 혀를 끌끌 찼다. 당해도 싸지. 고개를 끄덕였다. 돌을 던지거나 오물을 투척하지는 않았지만 조리돌림 행렬을 따라다니며 은근히 이벤트를 즐겼다. 슬쩍 발길질도 하고 욕을 했다. 아닌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아무도 머리채를 잡은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이 죽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누가 불쌍한 그 여자 머리채를 잡았나. 그놈을 쳐 죽여라. SNS에 글이라는 걸 쓴다. 그 여자의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을 색출하라. 


그러다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이 년이다. 불쌍한 그 여자를 협박하고 돈을 뜯어냈던 그 년이 바로 이 년이다. 얼굴을 공개하고 또 다른 조리돌림을 시작한다. 실제로 보았다.


살풍경. 


글이 비수가 되어 날아다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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