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이란 단어는 남 얘기라고 믿던 어느 가을, 갑자기 회사 근처로 찾아온 옛 연인이 한 말이다. 거의 7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고 반가웠다.
"응. 별일 없이 잘 지내지."
대답을 들은 그녀는 웃으며 다행이라고 했다.
"요새 무슨 일 해?"
"응. 부천에서 피부관리하고 있어. 다닌 지 꽤 됐어."
비싼 회원제로 운영되는 피부관리숍에서 일한다고 해 도와줄 요량으로 회원가입 비용을 물어봤지만 내가 들어갈 세상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사는 얘기를 조용히 말하며, 콜라를 따라둔 나를 앞에 두고 소주를 혼자 마셨다.
찾아온 다른 이유가 있을 법했지만 먼저 말하지 않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오빠 별일 없지? 나 이혼했어. 어쩌다 보니 사정이 그렇게 됐네. 그때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얘기 못했어."
"아이고. 그렇구나. 마음은 좀 괜찮아? 힘내고. 근데 어떻게 하다가..."
이혼의 얘기를 듣고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을 때.
"남편이 친구를 못 만나게 해. 그리고 술도 못 먹게 하고.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같이 못 살겠더라고. 남편이 절대 이혼은 안된다고 버티다가 결국 이혼 서류에 사인해 줬어. 그리고 난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오빠도 잘 살아. 다음에 연락할게."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이혼 얘기인 줄 알았다.
***
내 나이 30대 초반, 친한 형이 양주를 파는 BAR를 오픈했다. 당시 유흥가로 엄청 뜨던 인천 부평에서는 여기저기 양주빠가 성행했는데, 경기가 좋은 시절이었는지 여성 바텐더 웃음에 남자들은 그 비싼 양주를 겁도 없이 시켰다.
그 사장형은 당시 나와 베프여서 퇴근 후 가끔 그 BAR에 들러 시간을 같이 보내곤 했다. 이름도 촌스러운 'O BAR(오빠)'였는데 매니저로 뽑은 여직원이 일을 잘해 성황이었다. 가게의 여직원들이 아직 뽑히지 않아, 매니저가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그 매니저의 남자친구가 부평의 유명한 건달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매니저가 동창이고 절친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175센티 정도 되는 키에 이국적인 외모의 미녀였다. 그 두 명이 가게의 메인이 되고 몇몇이 파트타임으로 일했는데 미녀들이 많아 단골이 점점 늘었다.
태어날 때부터 알코올과 안 친한 내 몸은 여직원들하고는 친해질 일이 없었는데 가게 오픈 때부터 알고 지낸 여매니저는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그 여매니저인 '미실'이가 나에게 말했다.
그 동진이란 놈은 내 나이 때 소위 인천 대장으로 불리던 일진 출신으로, 건달 무리에 잠시 몸담았다가 빠져나온 한량이었다. 그리고 그 미실이의 남자 친구는 현역 건달이었는데 굳이 통성명을 하며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러려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건달이 연락이 두절된 여자 친구 미실이 때문에 열이 받아 가게로 찾아왔다.
(나중에 듣고 보니 미실이는 자주 연락을 씹었다고 한다. 특히 술이 취하면.)
웬 곰 한 마리가 들어와서 씩씩대고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곧 사고가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보였다. 미실이가 자기 남자 친구의 성격을 식사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잠수 타면 어떻게든 찾아내 헐크로 변신하고 주변을 위협하고 물건을 부순다고 했다.
지금 미실이는 취해서 남자 친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더 열받게 하려는 것처럼 앞에 있는 남자 손님에게만 열중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미실이에게 어떻게든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저 중년 아저씨는 자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걸 알기나 하나.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이, 사장형은 내 등을 떠밀었다. 한 다리 건너 친구라는 사정을 듣고 알고 있었다.
"휴우. 저러다 사고 나겠다. 네가 좀 가서 해결해 봐."
사실 나도 딱히 방법이 없었는데 여기서 무료로 먹구 논 빚이 있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은근슬쩍 옆에 가서 말을 걸었다.
"흠흠. 너 동진이 친구라며? 미실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기회 되면 다음에 같이 술 한잔 하자."
날 경계하며 째려보는 곰 한 마리.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는 내 말을 잘 받아주었다.
"어. 그래. 네가 XX구나. 얘기 많이 들었다."
다행히 그 곰 같은 놈은 생각보다 동진이랑 친했고, 미실이가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했는지 금방 말을 트고 친하게 굴었다. 그날 상황도 잘 정리되었고.
몇 달 후 미실이가 생일이라며 술자리에 초대했는데 장소는 그 건달 친구가 운영하는 계산동 룸살롱이었다. 그 자리에는 미실이와 건달 친구 그리고 그 미실이 베프인 BAR의 키 큰 미녀가 있었다.
무언가 셋이 작전을 피나 싶었는데 건달 친구 놈이 작정을 한 듯이 나에게 술을 먹였다.
"야아. 오늘만 마시자. 미실이 생일이자나. 부탁이다. 친구야."
평상시 콜라만 마셨지만, 오늘만큼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푹 절은 홍어가 되어 뻗기 직전이었다. 정말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귓가에 미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제 친구가 오빠 좋대요.얼레리 꼴레리~"
그리고 술기운을 못 견디고 뻗어 버렸다. 잠시 후 건달 친구가 나를 업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은 없지만 싸늘한 느낌.
이대로 장기가 털리나.
이런 상상을 하며 공중에 떠있는 기분을 맘껏 느낄 때쯤 내 몸이 침대에 내팽개쳐졌다. 그리곤 또 누군가 나를 흔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