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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05. 2023

그녀가 남긴 메시지

이혼하면 어때 #10

유복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크게 힘든 일 없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부와 직장을 핑계로 집안일을 거든 경우가 적었다. 심지어 군대도 특례를 받아 연구기관에서 대체 복무했기에 생활형 기술은 평균 성인 남성에 미치지 못했다.


서른 살 즈음, 먼 직장을 핑계로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오피스텔에 혼자 살았다. 운이 좋은 건지 천성이 그런 건지, 그때도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가 주말마다 놀러 와 집안 청소며 빨래며 온갖 잡다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주는 터라 당연하다고 느끼고 살았나보다.


이런 상태로 결혼한 나의 미숙한 가사 스킬과 태도는 전처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음이 자명하다.


"옷은 색깔 별로 분류해서 빨래 통에 담으라고 했지!"

"청소를 하려면 구석구석 해야지. 왜 이 쓰레기통 밑은 이렇게 더러워. 다시 해!"

"오빠. 변기에 오줌 싸면 주변 좀 치워. 다 묻었자나."

"옷을 이렇게 걸어 놓으면 어떻게."

"설거지를 했으면 싱크대에 물을 다 닦아야지. 물이 다 튀었자나~"

"아~ 진짜 어떻게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니!!!!"


전처는 청소와 설거지 위주로 나름 할만한 일을 할당해 지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사분담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결혼생활 내내 불만을 토로했다. 그 부분에 심정적으로 동의했지만 나의 게으름으로 배우자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모든 가사가 내 몫이 되었고, 젊은 날 내게 있던 도련님 버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혼자가 된 직후, 제일 처음 챙긴 것은 돈에 관한 부분이었다. 모든 공과금을 내 명의로 바꾸고, 자동이체 등을 설정했다. 그전에 모든 경제권은 전처에게 있었으므로 이혼 후 한동안 그 부분을 물어보고 해지 및 재등록하느라 연락이 오고 갔다.


돈에 관해서는 매정하리만큼 철저했던 그녀는 1원 한 푼도 어긋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녀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토하나 달지 않고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정리하여 명의 변경 및 정산을 마무리했다.


두 번째는 식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혼자가 되고 보니 먹는 것이 문제였다.


평일은 애꿎은 회사 동료에게 이유를 만들어 식사를 해결했지만 주말이 문제였다. 할줄 아는 요리는 라면 뿐이며, 배달음식은 좋아하지 않아 나가서 사 먹는 일이 많았다.


해결책이 될 수 없어 동네 반찬가게를 찾아 방문했다.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를 일주일 정도 먹을 생각으로 고르고 나니 5만 원이 훌쩍 넘었다. 이것저것 치밀하게 계산하지 않아도 비용이나 드는 품이 외출해 사 먹는 것보다 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인천에 계신 어머니에게 상담을 했다. 그래서 나온 솔루션은 햇반과 컵밥이고, 반찬은 어머니에게 공수했다.


세 번째는 청소와 빨래였다. 털과 먼지 알레르기가 선천적으로 심했던 터라 세탁기와 건조기를 시도 때도 없이 돌렸다. 그러다가 알게 된 흰 옷과 색깔 옷의 분리, 수건의 별도 빨래, 물로 하면 안 되는 옷 빨래 등을 깨달으며 예전의 내 모습을 자책했다.


청소도 마찬가지로 매일 쓸고 닦으며 집안 곳곳을 신경 썼는데, 이불 진득이를 우려한 별도의 청소기도 구매하여 열심이었다. 먼지 한 톨 용납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마지막은 생활용품의 구비였다. 전처는 본인의 살림인양 거의 모든 것을 처가로 가져갔는데, 그 품목은 나의 개인적인 용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었다. 주방 식기, 청소도구, 생활도구, 관리도구 등이 전무한 상태로 변했으므로 동네 '다이소'를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유튜브와 다이소는 내가 1인가구형 인간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학습도구이자 실습공간이었고, 사회초년생의 마음으로 하나하나 배워 적응해 갔다.


***


나의 무지와 게으름, 혹은 외면으로 고통 받은 전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안일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진행할 때마다 관련된 일에 신경을 써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곧, 대부분의 가사 문제와 해결은 그녀가 압도적으로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았음이 분명하다는 증거다.


더불어 사소한 물품마저 남김없이 가져간 그녀의 무정함에 감정이 복잡했다. 혼자 있으면 반드시 필요할 법한 식기와 조리도구도, 여분의 옷가지를 걸기 위한 행거도 모두 사라져 하나하나 구비해야 했던 수고로움은 나에게 주는 메시지 일까?


‘네가 하나하나 다 사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관리해야 하는지 모두 느끼면서 내가 있었던 소중함을 알고 평생 후회하며 살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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