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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23. 2023

둘에서 혼자가 된 직후 - 2

이혼하면 어때 #9

마지막 날,

그녀는 이혼을 준비하며 구입한 자동차에 고양이 '유리'를 태우고 떠났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말투.


"잘 살아."


좀처럼 본적없는 운전대 잡은 모습. 주차장을 나서며 내게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보며 무심코 담배를 물었다.


'흠. 끊으려고 했는데, 당분간 계속 피겠네.'


희한하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보통 이런가? 그냥 일상인 듯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눌렀던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느낌이 생소했다.


삐.삐.삐.삐.삐.삑. 띠리로리~


현관문을 열고 미닫이식 중문을 열고 잠시 서있었다. 새삼스레 시선을 집안 곳곳에 두며 눈에 담았다.

차가운 공기와 왠지 모를 스산함. 그것은 꼭 빈 공간의 허전함 뿐 아니라, 어떤 생물의 온기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자... 이제 청소를 해볼까."


기운빠진 혼잣말을 하고 다이슨 청소기를 손에 잡았다.


간단하게 거실을 청소를 한 후, 얼마 없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혼 합의 후 몇 달이나 내 물건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합의 후 그녀는 꾸준하게 물건을 정리하며 꺽이지 않는 의지를 보여줬는데,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하며 그 자리를 지킨 것일까? 다시 물어봐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었다. 다만, 지금은 정리를 하며 마음을 다스릴 타이밍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여성의 옷가지였다. 어차피 입지 않으니 놔두고 간 것이겠지만 여기저기서 많이도 발견됐다.


'드럽게 많네.'


주섬주섬 모아 들고 동네 옷수거통에 모두 버렸다.


그러고 나서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이었다. 원래는 서재로 사용했던 중간 방에 내 노트북을 올려두고 사용했는데 왠지 안방 침대 옆으로 옮기고 싶었다.


집 안 공간을 분리해 용도를 다르게 사용한 것은 동거하는 다른 이를 배려하기 위한 일종의 규칙아닐까?


혼자 살게 된지라 노트북에서 뭘 하다 바로 잠들고 싶은 생각이 들어 위치를 바꿨다. 자리를 옮기고 보니 그럴듯해 만족했다. 다만 어울리는 책상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방을 돌아보니 내 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세탁실로 이어지는 작은 방은 우리 두 명의 옷을 수납하기 위한 전용 공간이었다. 전처의 옷이 다 빠지고 행거 마저 가져가고 없어 내 옷만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다.


"컴퓨터 책상, 행거,.."


그리고 또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 중에 소파에 누었다. 유튜브를 켜고 검색어를 썼다.


'혼자 사는 남자 집 꾸미기'


혼자 사는 사회초년생부터 독거노인까지 여러 영상을 보며 나와 비교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어딘지 모르는 이상한 동네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길가를 걷고 있었다. 저 멀리서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앞서 간다. 그리고 내가 따라오는 것을 기다리다 다시 앞서갔다.


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계속 따라갔다. 고양이는 계속 나를 따라오라는 듯 한 번씩 냐옹거리고 다시 앞서 갔다.


냐아옹.


고양이를 따라 30분 정도를 걷다 보니 공사 중인 건설 현장이 나왔다. 하지만 건설이 중지된 지 한참 돼 보였다. 고양이는 그곳에 멈춰서 나를 보더니 폐자재가 쌓여있는 어느 구석으로 갔다.


나는 덜컥 겁이 나 가기를 멈췄지만 고양이는 계속 나를 기다리며 울었다.


냐옹. 냐옹.


나는 큰 맘을 먹고 그 건설현장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고양이가 사라진 폐자재 속에는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누워있었다. 나는 그 새끼고양이들을 가슴에 앉고 길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물과 사료를 주고 싶은데 집이 어딘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새끼들만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


꿈에서 깨니 아침이었다.


이게 무슨 꿈인가 싶어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너무 생생했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며 이혼하고 혼자 사는 첫날이라는 걸 자각했다. 아침 식사는 원래 챙겨 먹지 않았지만 먹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돌싱이 된 첫 번째 날을 시작했다.


원래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어 평생을 고생했지만, 결혼 후 '유리'를 키웠고 사랑과 희생으로 버티며 살았다. 하지만 이혼과 함께 내 곁에 없으니 집안의 고양이털은 다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날은 내 평생에 청소를 가장 열심히 한 날이 아닌가 싶다.


청소하는 내내 어젯밤 꿈에 나온 고양이들은 무슨 의미였을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청소를 마무리하니 제법 깨끗한 집이 되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집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 잘 먹어야겠다는 이상한 다짐이 들어 집 근처에 위치한 고급 한식집에 들어갔다. 전통 한옥이 유지된 이곳은 한 끼 해결로는 가격이 꽤 나가기 때문에 결혼 생활 동안 두 번 밖에 안 온 음식점이었다.


탁자 위의 모든 음식을 꼭꼭 씹어먹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커피를 찾았다. 무심코 주방테이블로 가서 커피를 내리려고 하니 커피머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 그녀가 가져갔지.


그제야 깨닫고 다시 겉옷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갔다. 커피숍은 꽤 멀리 있었다. 10분 정도 걸어서 지하철역 근처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제 돈 아껴야 하는데 스타벅스는 사치인 걸까.'


평소와 다른 궁상을 떨었지만, 이제부터 모든 걸 계산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잔이 사치인지 아닌지 치밀한 계산을 하는 동안 커피가 나왔다.


"이제 막 돌아온 싱글' 고객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스타벅스 닉네임을 '이제 막 돌아온 싱글'이라고 정해놓고 불리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이런 망상을 해보며 혼자 킥킥거렸다. 실제 나를 부른 이름은 의미 없는 숫자 배열이었다.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빨래거리를 모았다. 빨래를 하면서 내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참 오래 입었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를 다닐 때 입는 와이셔츠와 바지를 제외하곤 모두 5년 이상은 돼보였다.


'내일은 옷을 좀 사야겠군.'


다시 베란다에서 담배를 물고 생각했다. 저녁엔 뭘 먹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요새 핫한 채팅형 AI인 'ChatGPT'에게 고양이 새끼 구조 꿈에 대한 해몽을 물어봤다.


고양이 새끼 구조 꿈은 여러 가지 해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일반적인 고양이 새끼 구조 꿈의 해몽입니다.

1. 새로운 시작:고양이 새끼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꿈을 꾼다는 것은....


마음에 드는 해몽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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