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면 어때 #12
그날부터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연인이 된 후 BAR 출입을 점차 줄였다. 아무리 사정을 미리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내 여자 친구가 술에 취해 다른 놈에게 술 따라주는 모습은 별로 구경거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또 한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그 사장형이 그녀를 은근히 마음에 둔 것을 사귄 후 알게 되어 왠지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나와 그녀와의 나이차도 어마어마했지만, 그 형은 뭐. 도둑놈 수준이지만.
연애기간 중 대부분은 서로의 출퇴근 시간 차이로 떨어져 있어 같이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녀가 주중 쉬는 날에 만나 데이트를 했는데, 나이보다 무척 성숙한 그녀 덕분에 어째서인지 나이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나를 맞추며 배려했던 그녀.
그래서 우리 주변 사람들은 나를 돈 많은 능력남으로 오해했고, 좀 억울했지만 그런 평판을 그냥 놔두고 은근히 즐겼다.
다른 연인들처럼 으레 잠자리를 같이 하는 날은, 주말에 일하는 그녀 때문에 대체로 평일에 약속했다.
"오빠. 우리 오늘 만나?"
"응. 그러자."
"몇 시까지 와?"
"아마 저녁 10시는 돼야 부평에 도착할 것 같아."
IT 개발자로 근무하던 시절이라 퇴근이 불규칙이고 늦었던 시절이었다. 항상 늦은 퇴근으로 저녁조차 같이 못하니 장소는 데이트 장소는 주로 잠자리를 겸한 모텔이었고.
"그럼 바로 출근해야겠네? 알았어."
그 말의 의미를 다음 날 아침 알게 되었다.
그녀는 다음 날 출근하는 나를 위해 새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사 와(숨겨 뒀다가) 아침에 새 옷으로 바로 갈아입을 수 있게 해 줬는데, 돈도 돈이지만 그녀의 정성에 진심으로 감탄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 옷 비쌀 것 같은데?"
"헤헤. 괜찮아."
그렇게 남들 부러워하는 연애도 잠시, 오래지 않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게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내가 잠든 사이에 내 핸드폰의 모든 문자와 내역을 검사하고 아침에 따지는 것이었다.
"오빠. 이 여자는 누구야? 분명히 며칠 전에 밥을 먹었다고 하고, 또 약속을 잡았네?"
"아. 내가 근무하는 계열사 담당 직원이야. 별 일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왜 걱정을 안 해!? 분명 이 여자는 내 기억에 3달 전에 2번이나 식사를 같이 했고, 저번 달에는 무려 5번이나 메시지를 ..."
그녀는 그랬다. 의심이 갈 만한 모든 행동과 내역을 다 기억하고 따졌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의심이 될만한 사이는 아니었고.
어느 날 아침은.
"헉."
아침에 눈을 떴는데 고개를 턱에 괴고 쳐다보는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깜짝 놀라 물어봤다.
"벌써 일어났어?"
그녀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 잠이 안 와서...못 잤어."
"또!?"
나와 있을 때 잠을 못 자는 불면과 불안해 보이는 정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알코올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마음이 조금씩 멀어져 결국 헤어졌다.
***
그 후 나는 결혼 전까지 가끔 그녀의 취중전화를 받았다. 취해도 기분 나쁘지 않은 목소리로 항상 다정하게 말해주는 그녀가 고마웠지만 다시 연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후, 그녀는 BAR에서 만난 어떤 건실한 남자와 결혼했다. 정말 내 결혼식 날짜와 단 6개월 차이였는데,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 섣부른 결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설마 나 때문에 홧김에 하는 결혼이 아니길 바랐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유부남과 유부녀가 됐고,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결혼 소식에 대한 축하 메시지를 짧게 주고받은 것이 다였을 뿐이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 그녀는 이혼 소식을 내게 전했고 그 이후 내 차례가 되었다.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중 이혼한 그녀가 생각났다. 문득 그녀는 이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해 카톡으로 조심스럽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메시지 확인을 하지 않았다. 바빠서 그런가 싶어 며칠을 기다렸지만 보낸 메시지의 '1'은 '0'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 후, 그녀의 절친인 미실과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너무나도 가슴 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몰랐어요? 화장실에서..."
"아...이런. 설마 했는데."
"우울증이 심했나 봐요. 제가 진작 신경 썼어야 했는데...흑"
옛 연인이었던 그녀는 이혼 후 부천에 아파트를 얻어 홀로 살았는데, 우울증이 심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손목을 그었던 것이었다. 당시 미실이는 신혼 생활 중이어서 그녀 옆에 자주 못 있어줬다고 울며 자책했다. 나는 그녀의 묻힌 곳을 물었고 그렇게 연락을 마무리했다.
소식을 알고 얼마동안, 일상은 온통 그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그녀가 이혼을 말하려 했을 때 금세 눈치채지 못한 나의 무신경함, 그리고 좀 더 위로해주지 못한 무정한 나를 질책하면서.
***
우리가 헤어진 후 한참 지난 어느 날, 술 취한 그녀에게 전화가 와 아무 말 없이 들어주었다. 나는 결혼 준비로 분주했고 그녀에게 아직 소식을 전하지 못할 때였다. 통화 중 수화기 너머 그녀의 엄마가 누구냐고 묻는 소리에 그녀가 대답했다.
"엄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 오빠야. 헤헤. 나중에 엄마 사위될 ** 오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