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면 어때 #22
부르릉..
차에 시동을 걸고 잠시 기다렸다. 차도 예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나도.
내면의 갈증이 온다. 납득할 수 있는 그녀의 변명으로 해소하고 싶다고.
한 시간 가량을 달려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익숙한 장소에 정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도'한 남녀를 기다리는 시간은 영겁의 그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다섯 개의 담배꽁초가 내 발밑에 흩어질 때 즈음, 사진 속의 남자와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로 차 뒷문을 열어 승차했다. 그 남자 후배도 뒤에 나란히 탔는데, 순간 나는 차를 이대로 몰아 중앙 차선을 넘어가고 싶다는 망상을 하며 운전석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
인사하는 그놈을 돌아보지 않고 백미러에 시선을 주며 말을 했다.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봐.”
그녀는 머리를 한쪽 차 유리에 기댄 채 긴 머리로 자연스레 얼굴을 가렸다.
“.. 어제 누나랑 술을 좀 마셨는데 술이 많이 취하셔서 저희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남자 후배는 자취를 하고 있었고, 둘이 술을 마시고 잤다는 아주 아름다운 얘기를 내 앞에서 했다.
거울로 보이는 둘의 모습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음 질문을 이어가려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작정 목적 없이 운전을 하고 있다가 입을 떼서 한 말은 내가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너를 추궁하거나 잘못을 탓하지 않을게.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이 일은 우리 셋만 죽을 때까지 아는 것으로...”
예상치 못한 말에 남자 후배는 고개를 떨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 나는 가까운 지하철역에 그 애를 내려주고 나서 아직도 고개 숙인 그녀에게 말했다.
“속은 괜찮아? 술도 못 마시면서 어젠 왜 그렇게 마셨어?”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정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 미안해..”
어제 같이 잤어? 어제 좋았어? 왜 그랬어? 내가 뭐가 부족했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집에 데려다줄 테니 마음 정리되면 연락해.”
상황을 피하고 싶었는지, 아직 헤어질 용기가 없었는지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한 15분 가량 말 없이 운전을 했고 어색한 정적만 맴돌았다.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기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
잠시 고민 후 그녀 집 근처 카페에 차를 세웠다. 카페 안 테이블에 앉아도 어색한 침묵이 여전했지만, 달달한 카라멜마끼아또가 내 몸속 당과 함께 활력을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그 활력은 결국 내 의지의 통제를 넘어섰고.
“... 잤어?”
"..."
대답 대신 침묵으로 긍정을 표현한 그녀는
"미...안해. 흑. 정말 미안해...흑흑."
곧 울면서 미안하다고 연신 말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우리는 여기까지구나.
"잘 어울리더라."
더 이상 묻지 않고 이별을 통보하면서 그와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테이블 의자에서 벗어나 무릎을 꿇으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다. 카페 내 사람들은 우리를 주시했지만 그녀에게 체면 따윈 없었다.
“으흐흑 오빠 미안. 정말 미안. 한 번만 용서해 줘. 정말 한 번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고,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흑흑.. 여기서 헤어지면, 저 차도에 뛰여 들 거야.”
나중에서야 내가 순진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너무 진심으로 보였다. 나는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 심산으로 가만히 지켜봤다.
“나 죽어도 괜찮아? 내 평생 오빠가 첫 남자고, 오빠만 만나서 다른 남자가 궁금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발 한 번만.... 제바알..”
그랬구나. 너는 그게 억울했구나.
성인이 되자마자 보잘것없는 나를 만나 아름다운 젊음이 가는 것이 불안했구나.
더 이상 그녀에게 벌을 주는 것은 가슴이 너무 아파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 내 목을 감싸게 하고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 나는 아직 헤어질 생각이 없었구나. 저 모습이 안심이 되는 건 뭘까.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아직은 헤어질 준비가 덜 되었구나. 너무 어린 네가 나를 만나 억울했으니 좀 더 참아볼게.
그게 네가 나에게 준 젊음에 대한 보상이야.
“후. 알았어. 이번은 넘어갈 테니 죽는다는 소린 마. 그리고 병원에 가보자. 혹시 모르니까..”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몸에 불행의 씨앗이 심어질까 두려워 말을 건네는 나는... 어른이었다.
그날 저녁, 그녀와 일면식이 없는 먼 선배를 찾아 못 먹는 술에 취해 펑펑, 아주 펑펑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