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피 Feb 25. 2023

돌싱공화국 - 1

이혼하면 어때 #33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모습을 회복했다. 집도 나도.

제법 사람 사는 곳처럼 바뀌었는데 (어머니가 집에 오셔서 이것저것 채우고 정리하셨기 때문이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건 시간으로 보아도 매우 고무적이었다.


닥치면 어떻게든 사는구나..


회사 내 친한 몇몇은 내 사정을 알고 저녁식사 및 여가를 함께 보내주었는데, 딱히 이혼 전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이 드는 시간과 주말을 제외하곤.


잠이 들 때 혼자 잠든다는 것은 이혼 전후의 가장 큰 변화이자 체감이었다.

생각보다 혼자 잠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는지,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전처를 원망하곤 했다. 저주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망상도, 행복을 비는 선량한 마음도 섞어가며.


마음을 정리해도 사람이 비어 넓어진 침대 한쪽으로 알 수 없는 한기가 들어오는 듯 했다. 눈 감으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내 숨소리.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심마(心魔)에 빠진 내 마음 탓이겠지. 나름 오래전부터 해왔던 명상과 복식호흡이 상황을 개선하는데 기여했다.


계획이 없는 주말이 의외로 고민이었다.

청소와 집정리의 과업을 끝내고 남아버린 시간들.

억지로 무언가 해야 하는 주말 시간이 꽤 고달팠다. 마치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심정이랄까.

예전처럼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네온사인이 찬란한 거리를 활개 치던 의지와 체력은 사라진 지 오래고,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전장을 누볐던 친우들은 누군가의 성실한 가장이 되어 있을 테니.


계획이 없는 밤이 되면 샤워를 했다.

의외로 혼자가 되고 나서 샤워를 자주 그리고 오래 했는데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샤워를 하면서 무언가 씻어내거나 정리하는 기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몸을 구석구석 씻다 보면 점점 잡생각이 사라졌고,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물줄기와 수증기가 몸과 마음에 평온을 주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그런 사정을 들은 한 직장 동료가 말했다.


"온라인 동호회나 카페를 가입해서 외부 사람 한번 만나보세요. 집 회사만 다니시지 말고."


그 말은 꽤 의미 있게 들렸다.

살아오면서 온라인 모임에 소속된 적이 없었으니 만날 기회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현실의 애인이나 아내와 같이하지 않는 모임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별도의 모임을 갖는 것은 아무래도 내 옆에 있는 연인에게 변명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니까 뭐.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한동안 인정하기 싫었던 단어를 타이핑했다.

'돌싱'


검색 결과로 나온 카페 목록 중 제일 상단에 있는 곳을 클릭했다. 이 온라인 카페의 첫 화면에는 최근 등록된 게시물과 광고가 몰려있었는데, 그것 만으로 이 카페의 덩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페 현황에 표시된 회원 수에 또 한 번 놀랐다. 주변에서 한 명도 찾기 힘든 이혼남녀가 여기에 다 있는 느낌이다.

그런 놀라움을 뒤로한 채 정리 돼있는 카테고리를 살펴봤다. 가지런히 정렬된 메뉴를 보니 오랫동안 운영되며 다듬어진 이 커뮤니티의 나이를 짐작케 했다. 그리고 비회원도 읽을 수 있는 게시글을 읽으며 이곳에 가입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입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가입인사 글을 올리고 본격적으로 슬기로운 카페생활을 준비했다. 제일 먼저 다른 회원들의 글을 읽기 위해 커뮤니티의 등급을 올려야 했다. 게시글과 댓글로 적절하게 참여할수록 등급이 올라가는 시스템이라 열심히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곳은 돌싱(혹은 오래된 싱글)들을 위한 온라인 공간이므로 남녀 간 만남이 우선 될 것이 뻔하다. 물론 나조차도 그런 기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그래서 훗날 이불킥한 게시글을 작성했다. 공개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어필하는 '질문과 대답'. 무언가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면 써야 할 듯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로 내 신상정보를 작성했다. 최대한 솔직하게 적었고 핸드폰을 열심히 뒤져서 가장 잘 나온 사진도 덧붙였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며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 소개 글을 보고 여성들에게 일대일 채팅과 쪽지가 와 있었던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느낌과 함께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이 뿌듯한 느낌.


'크하하. 그래. 나 아직 안 죽었구나.'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찰나. 갑자기 밀려오는 이질감.

10년 가까이 나와 함께 했던 한 여자에 대한 소속과 의무.

그것으로의 해방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야릇한 흥분과 기대.

알 수 없는 감정과 두근거림을 느끼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전 12화 장미의 바이섹슈얼(bisexual) -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