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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27. 2023

돌싱공화국 - 3

이혼하면 어때 #35


어느 따뜻한 봄과 여름의 사이.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기 전이었다.

카페 회원 한 명이 영화모임 참석을 제안했고 흔쾌히 응했다.


당일.

오늘은 또 어떤 이들과 친해질까. 기대와 함께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관 자체도 오랜만이라 생각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모임 장소는 월드컵 경기장 근처의 어느 영화관이었다. 경기장 근처는 규모가 큰 행사가 열린 듯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 많은 인파 속은.'

이런 광경 속 여유로움은 꽤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 몇 년간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 여유 없던 결혼생활을 소심하게 자책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지난 일임을 자각했다. 그리고 약속장소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이번 모임에도 첫번째로 도착해 아무도 없었다. 생각보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어 그늘을 찾아 쉬고 있었는데, 담배 두 개비 정도 피울 시간이 지나니 일행으로 짐작되는 여성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중 한 명이 먼저 아는 척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몸에 밴 담배 냄새를 털어내며 그녀들에게 다가가는 나.

구면인 여성이 있어 같은 일행임을 확인하고 근처 카페에서 다른 이들을 기다렸다. 그중 한 명은 첫 번째 나간 독서 모임 때 내 옆에 앉은 여인이었다. 원래 주최자가 따로 있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참석을 못해 그녀가 대리해서 일행을 통솔했다.


"사람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죠."

"넵."

"자리 때문에 두 관을 예약했으니 저랑 **님은 저쪽 관으로 가서 관람하죠."

"넵."

"영화 끝나면 이 커피숍 앞 로비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죠."

"넵."

"그리고..."

"네엡."


이 커뮤니티 사회에서 나는 햇병아리였으므로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새내기의 기분은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약 열명 남짓한 인원이 함께 영화관람을 마친 후 예약된 호프집으로 갔다. 영화관과 호프집은 꽤 거리가 있어 15분가량 단체로 걸었다. 도착한 호프집은 도시 속 조용한 주막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음식과 맥주를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한 명 두 명 자리를 떠났다.


***


마지막까지 남은 남자 둘, 여자 둘.

나를 제외한 세 명은 얼큰하게 취해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 다른 장소를 찾고 있었다. 몸의 컨디션을 체크한 후 이들의 결정에 동참했다. 코로나로 인해 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가 없었다. 우리는 무작정 구글 지도를 따라 홍대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한 시간쯤 걷다 보니,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도시 속 한적한 풍경이 되었다. 우리는 감각에 의지한 채 대충의 목적지로 이동 중이었다. 새벽 공기를 느끼며 주제 없는 대화로 걷고 있었는데, 다른 이와 대화 중이었던 그녀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시선을 돌려 쳐다봤다. 질문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착각마저 들었는데, 그 순간의 느낌은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오.빠.

우리는 서로의 호칭을 온라인에 정해둔 별도의 이름으로 부르고, 또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는 ‘오빠’란 단어는 유지했던 관계를 넘어서는, 도파민이 머릿 속에 터지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온라인의 여자 사람에서 현실의 그녀가 되는 순간.

고요한 호수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지듯 작은 파동이 몸 안에서 커져갔다. 지금껏 무미건조했던 대화는 나를 집중시켰고, 풍기던 술냄새는 페로몬 향기가 되어 다가왔다.


네. 저는...

카페 내에서 학벌, 직업 등으로 알게모르게 계급이 나뉘며 돌싱 시장도 무리지어 다닌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이쁘면 됩니다.

라는 뒷 말은 속으로만 내뱉었고.


말 끝을 흐리며 다시 앞을 보며 걸었지만 왠지 내 오감은 그녀를 향해 있는 착각이 들었다.

홍대역 근처 술집에서 아침이 되길 기다리며 긴 여정의 마무리를 준비했다. 모두 피곤함에 절어있었지만 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늘의 만남이 내게 큰 변화를 주는 것을 느끼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에 몸을 피하는 흡혈귀 무리처럼 지친 몸들을 이끌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집에 도착한 나는 한참 동안 심쿵한 순간이 가슴에 남아 쉽게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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