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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26. 2023

돌싱공화국 - 2

이혼하면 어때 #34

"안녕하세요. 문답 보고 멋진 분인 거 같아 용기 내서 연락 드려요."


처음 열어 본 쪽지의 내용이다. 이런 걸 받아 본 적이 몇 년, 아니 몇십 년 전이지? 생전 처음인 것도 같고.


"... 전 경기 남부 살구 나이는 **년생입니다. 하하. 친하게 지내요!"


어떤 의도로 메시지를 보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직업은 뭘까?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린데, 뭐가 맘에 들어서? 다단계나 보이스피싱은 아닐까?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의심 같은 사념(思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른 쪽지를 열었다. 긴 장문의 글이었다.


"안녕하세요. 소개글 보고 연락드립니다.

예전에 소개글 보고 제가 '좋아요' 눌러 놓고 잊고 있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카페 접속했다가 좋아요 한 글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어떤 분인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용기 내어 쪽지 보내봅니다.


저는 **년생이고요, **시에 살고 있어요. 너무 먼가요? 제 기준에는 먼 거리는 아니고 제 인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겠다는 맘이지만 서울분들은 지방은 많이 멀다는 생각이 많으시더라고요.


저는 결혼식만 올리고 하루도 결혼생활은 못해보고 헤어진 케이스예요. 물론 상대방 유책이었고, 혼인취소까지 가능한 사안이었어요. 물론 혼인취소 소송은 하지 않았어요. 소송 기간이 너무 길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서요. 그래서 이혼 초기에는 하루빨리 좋은 인연을 만나서 지난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에요.


평범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혼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어요. 아직도 하루빨리 인연을 만나고 싶지만 제 의지가 부족한 건지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건지 몇 년째 제자리에 있네요.


글을 보고 평범하지만 마음 따뜻하신 바른 분인 것 같아 어떤 분인지 더 알고 싶어 졌어요. 제 소개를 한다고 했는데 많이 부족할 거예요. 혹시 더 궁금하신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럼 답장 기다릴게요."


다들 사연이 있고 비슷한 마음이구나. 재밌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돌싱들의 현주소다.


그렇게 쌓여있는(그래봐야 5개 남짓) 쪽지를 하나하나 읽으며 답장을 했다. 그것이 비록 '복붙'한 내용일지라도 보내준 성의에 감사하며 정성스레 회신했고 그 시간을 즐겼다.


다만 만날 용기는 없었다. 아직 다른 이성을 만나기엔 그전 결혼생활이 길었을까. 아무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성의 만남보단 여러 사람과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포장 없이 웃고 떠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나의 두 가지 제약조건을 고려해야 했다.

우선 술을 전혀 먹지 않는 나의 취향과 수술 후 후유증이 남아있는 육체였다.


"어디 보자. 흠. 술 모임 뿐인가."


그러다 눈에 띈 것이 독서모임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어떻게 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회원 신청 후 용기를 내 오프 모임에 참석하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


몇 년 만에 혼신의 힘을 다한 코디로 겉모습을 꾸민 채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모임 시간은 오후 3시였는데 긴장한 나머지 2시간이나 먼저 도착해 버렸다. 먼저 모임 장소를 눈으로 확인한 후 근처 커피숍에 앉아 당일 주제였던 책을 보며 어떤 얘기를 할지 고민했다. 읽고 또 읽고. 소리 내서 말해보고.


평상시라면 10분이나 15분 전에 먼저 입장했을 테지만, 이 날은 정시에 딱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는 것보다 한꺼번에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작은 스터디 룸이었다. 방 안에는 대략 5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방문 안에 들어서 인사하자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저...."

"**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살폈다. 방안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대체로 많아 보였고 서로 구면인 듯했다.

짧은 자기소개 후 미리 준비된 토론 발제문에 따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려는 찰나 한 여성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높은 톤의 차가운 보이스.

"어. 왔어?"


방안의 누군가가 맞이해 주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정확한 얼굴과 표정을 확인할 수 없지만 상당히 젊어 보였다. 내 옆이 빈자리라 가까이 왔다. 털썩 앉는 여성의 실루엣이 보이고.

그리고 잠시 뒤에 풍겨오는 좋은 향수 냄새. 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너무... 가깝자나."


얼굴을 돌리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안에 모든 사람들은 이미 이 여성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곧 남성 한 명이 더 들어온 후 본격적인 독서모임이 시작됐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 입학 전 친누나가 사준 '소설 영웅문' 1권을 시작으로 무협과 장르 소설에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대여점(지금은 없어진)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 문학 책도 꽤 접하며 성인이 되었다. 2,30대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자책과 웹소설이 주류가 된 오늘날까지 읽기를 놓아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재밌다, 재미없다만 피드백하는 싸구려 독자지만.


독서 토론이 끝날 무렵,

남아있는 나의 자신감 게이지는 바닥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독서 지식과 토론이 몸에 배어있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할 때 즈음 뒤풀이를 위한 2차 식사 자리로 이동했다. 삽겹살과 간단한 맥주로 사람들은 일상을 얘기했다.


"이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혹시 이혼하고 연인이 있으셨나요?"

"이혼하고 생활 중에 제일 곤란한 것은 뭐였어요?"

"쪽지나 일대일 채팅이 오는 사람은 만나기도 하나요?"


겁도 없이 물어본 나의 질문들이다.

실제 궁금한 것을 필터 없이 막 물어보았는데 다들 성의있게 대답해 주었다. 모두 친절했고 좋은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진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게 뒤풀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쯤 어떤 나이 지긋한 남성 분이 내 앞에 있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었는데 특히 이성에 관한 조언이 많았다.


"**님. 열심히 카페 생활하시면 '저처럼' 끊임없이 이성을 만날 수 있어요. 파이팅 하세요!"


허세가 있었지만 의외로 안도감이 드는 말이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


가입한 온라인 카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나날이 재창조되는 콘텐츠가 주는 중독은 마약과도 같았다.


회사 근무시간, 휴게시간, 심지어 볼 일을 보는 시간조차 그 안에 매몰되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작은 도시를 이룰 만큼 모여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서사가 궁금했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과 사연이 있었는데 그중 이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물론 미혼 싱글도 많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다 아름답진 않다.

오히려 분노와 아픔이 점철된 슬픔이 많지만, 극복해 가는 과정은 나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누군가 들려주는 아픈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는 어설픈 위로나 슬픈 표정 따위는 짓지 않았다. 그 슬픔은 온전히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고개만 끄덕일 뿐 감히 공감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때때로 내 이혼 이유와 과정을 물어보는 이들에게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게 이혼 사유였나 할 정도로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아무튼 우리는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친구 혹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 여기 모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커뮤니티는 내 삶에서 점점 비중이 커지고 있었다.

회사 구성원들이나 지인들도 모르는 내 이혼사실이 이곳에선 설명과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좀 더 진실된 나를 보여줄 수 있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돌싱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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