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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Mar 10. 2023

돌싱공화국 - 4

이혼하면 어때 #36


조금씩 이곳에 스며들었다.

성실하게 게시글을 쓰고, 다른 이의 글에 댓글을 달며 소통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독서 모임도 참석했다.

그날의 설렘 이후 그녀가 궁금했지만, 그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할 용기는 없었다.

이곳은 내가 주인공이 아닌 곳.

낯선 세계이므로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두 달 후.

"통화 가능하세요?"


메시지가 왔다. 기다리던 그녀에게.

그것은 우리 최초의 사적 연락이었다.


그녀는 카톡 대화보다 통화를 선호했다. 그간의 안부를 짧게 물어본 후 사적인 고민을 토로했고 나는 그저 들었다. 카페 내 사람들과의 갈등이었는지 배경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알아듣는 척만 했을 뿐.


"... 정말 이해가 안 되지 않아요? 그게 뭐라고. 나한테 이렇게..."


한참 동안 괴로움을 토해낸 그녀는 내심 기분이 풀렸는지 목소리가 평온해졌다.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그녀와 나의 첫 번째 통화가 끝났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해도 되겠다는 작은 용기를 갖게 되었다. 전화 통화를 했다는 건 암묵적으로 연락을 해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며칠 후, 소심한 거짓말로 그녀와의 만남을 계획했다.


"여보세요? 저예요. 제가 장례식장을 들렸다가 그 근처에 갈 일이 있는데 커피 한 잔 할래요?"


그녀는 흔쾌히 좋다는 대답을 했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갔다. 물론 장례식장 일정은 거짓말이었다. 그날 입은 옷이 검은색 차림이라 적당히 둘러대며 만날 이유를 찾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먼저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났다.

"여기에요!"


반가운 손짓을 하며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함을 기다렸다. 그녀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떤 것을 드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살게요."


그녀는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 주문을 하고 돌아왔다.

테이블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나에 대한 호감을 찾으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내내 차가운 얼굴이었다. 함부로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왜 모임에 안 나오세요?"


벌써부터 본론을 꺼낸 말센스를 속으로 탓했다.


"바.빠.서.요."


아. 그렇겠지. 바쁘겠지. 더 이상 부연 설명은 안 하겠다는 단호한 억양.

하지만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커피만 연신 들이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좀 지루했는지 꼬는 다리를 바꿔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은 카페 한쪽 유리창 벽면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카페 커뮤니티에 대한 적은 정보량과 개인적인 질문 자제가 대화를 건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소한 잡담을 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잘 들어왔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같이 있던 시간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좀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때 느낀 새벽의 감성은 너무 설렌 기억이라.


***


며칠 후 그녀에게 영화를 보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또 만났다.


온갖 잡생각으로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오늘 중에는 서로의 감정을 진전시킬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몇 번의 곁눈질로 그녀의 표정을 살펴도 마스크로 인해 알 수 없는 눈빛만 확인할 뿐이었다.

영화 관람 후, 그녀의 제안으로 삼겹살집에 갔다.


"맥주가 좀 땡기네요. 근데 술 안 드시죠?"


그녀의 집 앞이라 편했는지 맥주를 먹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망설이던 그녀는 끝내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을 전혀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였으리라.


나름 열심히 고기를 뒤집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나의 고기 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말했다.


"고기 구워 본 적 없어요?"


고기 구울 때마다 욕을 먹거나 집게를 뺏겼던 과거가 떠올랐다. 어느덧 대신 구워줄 사람이 주변에 많아질 나이와 위치가 되어 기회도 많이 줄었고.


내심 부끄러워 말만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제가 고기 굽는 것 빼곤 다 잘합니다."

"됐고. 집게 주세요."


영화 타짜의 대사가 떠오른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불편한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그녀가 역 앞까지 배웅하겠다고 했다. 역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는데 꽤 긴 정적으로 나란히 걸었다.


그녀의 하이힐이 무척 불편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옆모습을 쳐다봤다. 큰 키와 비율 좋은 몸매가 주변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도도한가.'


역 입구에 도착해 또 만나자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음 ... 오늘... 즐거웠습니다."


타이밍을 놓쳐 말 한마디 던지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등 뒤에서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내뱉은 한마디가 들렸다.


"오빠. 잘 가요."


고개를 돌려 묻고 싶었다. 우리가 남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지.

하지만 내가 살아온 수십 년의 경험이 그것을 말렸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씁쓸했다.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걸로 고민 중이며,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쯤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만두고 싶어졌다.


또, 그녀가 내게 털어놨던 여러 가지 일들은 결국 남자들과의 문제였는데 상담역까지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혼자만의 썸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그녀는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지인을 통해 그녀의 안부를 묻는 것이 다였다.


가끔 등장하는 카페 글과 댓글에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라인 카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친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 사람들과 같이 있음이 활력을 주었다.

가끔 혼자된 그들끼리 사랑하고 또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며 응원하고, 또 위로하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사는 삶도 괜찮다고 느낄 무렵,

또 다른 '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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