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스>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
시청 홀에 앉은 노인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가 자신이 생각해 온 건의 사항이나 알리고 싶은 것들을 말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음을 꺼내어 말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남긴다.
간단한 듯한 그 메세지가 어찌나 묵직하던지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먹먹함을 놓을 수 없었다.
본래가 아스퍼거(자폐의 일종)인 데다, 매일 하교를 하고 나면 과외 혹은 학원 일정을 따라가기 바빴던 나는 청소년 시기에 친구와 수다를 떨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설거지 하는 엄마 옆에 다가서면, 엄마는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쉬지 않고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를 하곤 했다. 참 듣기 싫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도, 적당히 내뺄 수완도 없어 참고 서 있었다. 사람이 고파서였는지, 뻔히 엄마가 설교를 할 것이 분명함에도, 다음날이 되면 나는 또다시 엄마 옆에 다가가 서 있곤 했다.
어느 날, 엄마가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랑스러운 미소를 한껏 지으며 말했다.
"저는 딸하고 얼마나 대화를 많이 나누는지 몰라요."
내가 엄마하고 대화를 언제 했더라... 그 때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동안 참고 들어왔던 설교를 엄마는 대화라고 생각해 왔었구나.
내가 말을 했던 건 과외 선생님들에게였다. 아마도 엄마가 '아이가 말을 하면 들어달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입술이 얼얼해지도록 말하고 또 말하는 동안, 과외 선생님들은 내심 그다지 관심없는 아스퍼거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영화에서 시청 공무원들이 노인들이 나와서 매일같이 하는 똑같은 말들을 들어주는 심드렁한 표정은 내가 과외 수업을 하면서 보아왔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노인들이 시청에서 매일 발표했던 말들은 허공에 한 번 울렸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고 노인들의 마음은 한 치도 더 채워지지 않는 듯 했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나의 외로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성인이 된 나는 과외를 받았던 입장에서 과외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에게 수업을 들으러 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속마음을 나에게 열어 보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언제 기분이 좋은지, 언제 상처 받았었는지, 부모님의 관계가 어떤지, 거기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느끼는지...
아이들은 내 앞에 앉아서 내 눈을 바라보며 내가 묻지 않은 저마다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담담히 꺼내놓곤 했다.
아이들이 마음을 열 때 내가 입을 열어 조언을 해주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그저 들어 주었을 뿐이다.
나는 영화 속 시청 사람들처럼이 아닌, 노인들과 눈을 맞추며 말없이 앉아 그들의 말들을 들어주던 외계인처럼 들어 주었다.
영혼 대 영혼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나의 말들이 허공에 사라져 버리기 전에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았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방에 우두커니 앉아있노라면 뒷산에서 새가 운다. 꾀꼴 꾀꼴
아름다운 소리가 마음을 깨우는 그 순간, 뒷산 반대편 어딘가에서 또다른 누군가가 같은 소리로 응답해 온다. 꾀꼴 꾀꼴
그러면 처음에 울었던 새는 그의 응답에 또다시 응답해 준다. 꾀꼴꾀꼴
새들조차도 서로의 소리에 응답해 주는 것이다.
내가 너의 말을 들었다고.
나도 어쩌면, 너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설령 다 알지 못하더라도, 너의 말은 내 안에 담겼으니,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