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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미스터리

by HONG Mar 15. 2025

박물관의 긴 복도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어두운 밤, 전시된 수많은 유물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박물관의 야간 보안팀인 나는 오늘따라 유독 출근 전부터 불안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이유 없는 불안감과 고장 난 듯한 직감이 나를 지배하는 그런 날.


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전시된 갑옷들을 바라보았다. 갑옷들은 지금 보기엔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결국 똑같다. 몇백 년이 지나도, 몇천 년이 흘러도. 싸우고, 빼앗고, 다시 싸우고..

이 갑옷들은 그저 그 흔적일 뿐인 것 같았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 전시되어 있는 유리창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묻은 게 보여 생각 없이 손으로 유리를 쓱 훑어내었다.

훑어낸 것을 확인해 보니 투명하고 점액질이 있는 액체 같은 것이 엄지로 살짝 비벼대니 바로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서야 나는 후회했다. '무슨 액체 같은 건가? 괜히 손으로 만졌네 이러면 안 됐는데..'

출근 전부터 삐걱거리던 불안이 드디어 녹슨 소리를 내며 나를 더 조여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따끔한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마치 무선 이어폰을 귓구멍에 너무 깊숙이 넣은 나머지 뇌까지 넣어버린 듯한 느낌의 소리가 울렸다.


— 인사한다.


나는 머릿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드디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황급히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커다랗고 고요한 박물관의 복도만이 내 인기척을 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야? 뭐야?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나는 불안한 마음에 정체 모를 소리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는. 이곳을 정복. 나 여기.

"어디를 보라는 거야?"라고 물어보기 무색하게 무의식적으로 나는 진열관의 한 갑옷에 집중되었다.

내가 진열장의 정체 모를 얼룩을 닦아낸 위치의 갑옷이었다.

— 정복자. 여기.

'이 갑옷이?' 나는  갑옷이 혹여라도 움직일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갑옷은 미동도 없었다.

야간근무를 너무 오래 해서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일까.

퇴근하고 집에 꼼짝없이 있다 병원을 가야 할까 생각했지만 어쨌든 다음 근무자가 올 때 까진 어림도 없었다.

이왕 미쳐버린 김에 이 상황을 근무시간을 즐겁게 보낼 파트너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너는 뭐 빙의된 갑옷 같은 거야? 아니면 외계인인가?" 나는 빈정대듯이 물었다.

— 우리는 별로부터 내려온 자. 뜨거운 불과 정복. 영광을.

이곳이 어디인가?

이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나는 내가 근무 중이라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세상에, 내가 얼마나 이 장소에 머물러 있었지?! 놀라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약 20분 정도 머물러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세계 최초로 외계인과의 교감을 시도 중일 텐데! 볼품없게도 근무 중이라 잠시 대화를 멈추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느껴져 조심스럽게 그에게 질문했다.

"어.. 음.. 저기, 내가 순찰업무 중이라서 어차피 내 머릿속으로 말할 수 있는 거지?"

또, 생각해 보면 내심 지루하고 가끔은 섬뜩한 야간 순찰 업무를 이 정체 모를 외계인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이상하게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 알 수 없다.

생각보다 재미없는 대답에 뭔가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안 들리면 어쩔 수 없고, 일단 나는 순찰 업무를 하고 다시 올게"

 — 이곳을 알고 싶다.

"음.. 너는 지금 갑옷처럼 보이고, 진열되어 있어. 여기는 박물관이고"

— 박물관?

"박물관이란 오래된 유물이나 미술품을 전시해 두는 곳이라고 해두지"

— '오래'의 기준을 알고 싶다.

" 음.. 대충 적어도 10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근데 넌 적어도 500년은 되어 보이는데? "


나는 대꾸가 없는 정체 모를 외계갑옷에게 벗어난 채 순찰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간혹 가다 머릿속이 따끔한 기분이 들었지만 갑옷에게서 멀어질수록 머리가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니 마치 와이파이처럼 신호가 멀어지면 텔레파시의 수신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업무를 하는 둥 마는 둥 빠른 걸음으로 순찰일지를 작성하고서 다시 갑옷 쪽으로 다가갔다.

매일매일 같은 일상 속 이런 비일상이 주는 자극은 도저히 사람을 침착하게 만들기 쉽지 않은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도착한 나는 혹여라도 내가 영영 떠나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이 외계인의 마음을 달래주려 부드럽게 인사했다.

"안녕? 미안해 이제 좀 여유가 생긴 것 같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나를 착용해라.

여기에서 나가고 싶다고? 자신을 입어달라고?

나는 뜻밖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밀려오는 생각을 정리해 나가기 바빴다.

일단 쟤를 연구소 같은 곳에 신고를 해야 하나? 근데 나는? 외계인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상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겁이 났고 그냥 모든 걸 다 모른척해버리고 싶어졌다.

"미안하지만.. 널 내보내 줄 순 없어, 아마 너는 연구소에서 분해될 테고 그리고 나도 너랑 대화했다고 같이 끌려가면 어떡해?"

— 연구소?

"그래, 그럼 너를 거의 입자단위로 분해해서 조사할걸?"

— 너와 소통. 너의 언어기반 이해. 알기 어렵다.

"대충 너를 쪼갤 수 있을 때까지 쪼개볼 거란 소리지"

가능한가?


가능하냐고? 당연한 소리를 되묻는 그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그동안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아무것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또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정복을 말하고 있던 것이다.

"네가 잠 들고나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 우리도 가장 가까운 위성정도는 직접 갈 수 있다고. 네가 외계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문득 이 상황이 꽤 재밌는 장난 같기도 했다. 진짜라면 더 심각해야 할 테지만, 대화가 된다는 사실에 어느새 적응해 버린 건지, 아니면 그냥 현실 감각이 마비된 건지. 어느 쪽이든, 이 갑옷 아니, 혹은 외계인과 이야기하는 게 나쁘진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정복자 외계인이 어떻게 이 갑옷에 존재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너는 왜 여기서 이렇게 잠들고 있었던 거야? 너는 그 갑옷이야?"

— 별과 함께 떨어질 때, 너무 강한 충격. 껍데기 필요. 주변 유기체 없음. 깊은 수면상태 실행. 유기체 필요.

아, 아마 소행성 같은 것을 타고 왔던 작은 생물이었던 그는 지구에 떨어졌을 당시 그렇게 엄청나게 충격을 받을 줄은 몰랐나 보다.

소행성과 함께 주변은 아마 작살이 났을 테고 아마도.. 자기 나름의 죽을힘을 다해서 파편들 중 갑옷에라도 기생한 것이 아닐까?


—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나는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에게 조금 지쳤지만 그래도 친절한 지구인의 인상을 유지하고 싶어서

최대한 그를 어르고 달래며 말했다. "여기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졌어. 그때처럼 단순하지 않아."

— 새로운 기술. 발달했는가?

"그래. 뭐, 나 같은 일반인도 아침이면 작은 네모상자 같은 걸로 은행 일도 보고, 전자 지도로 길 찾고, 그러고 있어."

그 기술로 무기를. 만든다면?

"무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다들 무기가 먼저야. 너희나 우리나. 이젠 버튼 한 번에 인류가 단 한순간에 사라질까 봐 많은 전쟁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전쟁하고 무기를 만들지."

— 한순간에. 어떻게?

"그래 버튼이나 스위치 같은 걸로 말이야. 전 인류가 폭발 한 번에 전부 사라질 수도 있을걸?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지."

갑옷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도 일종의 말 같았다. 무겁고 오래된 철이 바람 없이 서 있는 느낌. 낡았지만 여전히 강한. 하지만 이젠 쓸모없어진.

— 나의 목적. 정복 그리고 다시 영광.

나는 이상하게 씁쓸했다. 정말 그랬다. 누가 누굴 정복하고, 누가 누굴 다스리나. 차라리 이 멍청한 외계인이 모두를 정복한다면 지금보다 나을까? 어차피 다 각자 도망가거나, 견디거나, 붙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세상인데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있는 외계갑옷이 지구를 지배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침묵을 깨고 그가 질문했다.

—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고개를 돌려 갑옷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투명 전시관 너머의 그것은, 여전히 미동 하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기척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그가 나에게 질문한다 뭘 해야 하냐고?

"모르겠는데."

"네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근데 말이야... 나도 언제 잘릴지 몰라서 이러고 사는 거거든. 너도 정복하러 왔다가 한참 잤으니까, 그냥 당분간 여기 있으면서 생각 좀 정리하는 게 어때?"

실컷 빈정거리고나니 조금 답답한 감정이 들었다. 이젠 그에게 진실을 말해줄 시간이다.

“넌 정복자를 자처하지만.. "

답답해진 마음과 꾹 눌리는 압박감을 참으며 나는 크게 한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여긴 이미 누군가가 다 정복해 놨어. 돈, 권력, 시간 그리고... 흠 뭐 그런 것들”

나는 시각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외계인의 기분을 달래 보려 최대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들썩거리며 대답했지만,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그가 이해했기를 바랐다. 자신은 더 이상 정복자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의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나는 이 알 수 없는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워져 나는 크게 한숨을 들이내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게 이 행성의 법칙이야. 사실은 진짜 정복자가 누군지 사람들은 신경도 안 써, 생각보다 지루하고 치사하지. "


— 나의 목적. 정복 그리고 다시 영광.

아. 이런!

그는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이젠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걸까?

과거의 자신이 이뤘어야만 했었던 그 영광이 너무나도 눈부셔 당장 눈을 멀어버린건 아닐까.


눌려있던 압박감이 스러지고 조금 지친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야간근무는 이제 끝났네.”
 갑옷을 향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지구 정복이고 뭐고.. 내일 다시 얘기해야겠어. 교대근무자가 올 거야.”

그리고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외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은 없을지도. 네가 마지막. 나를 착용해.

— 정복 그리고 다시 영광을.

나는 멈칫했다가 이 모든 게 지치고 우스꽝스러워져 웃었다.

“내일 없는 인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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